10장. 책략가

소설 [E.V.E.]

by 이쥬니

“뭐라고?”
두 남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함께 세상을 뒤집자고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봉변이람. 리오와 에녹은 동시에 멍해졌다. 그녀의 등 뒤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영웅의 후광처럼 번져 있었다. 두 사람은 한순간, 정말로 이 여자가 신화 속 인물처럼 보였다가, 곧 정신 나간 게 틀림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세렌은 그들의 표정을 읽고는 오히려 환하게 웃었다.


“단순히 링크를 고치는 것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같이 제3 더스트로 가자고요. 거기서 작전을 완성하고, 이브를 무너뜨릴 겁니다. 더스트 사람들도, 우리도, 더 이상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거죠.”


에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 계획… 너무 위험하네. 그 시스템은 내가 알던 때보다 훨씬 진화했을 텐데.”

리오도 곧장 거들었다.

“맞아. 이브를 어떻게 무너뜨린다는 건데? 위험하다고.”


두 남자의 시선이 동시에 세렌에게 꽂혔다. 긴장감이 서늘하게 흘렀다. 그러나 정작 세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브는 견고하죠. 사람들의 지지도 받고 있고, 확실히 위험하고 무모한 계획이에요.”


그 말에 두 남자는 동시에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무색하게,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쌍둥이였다.


“그래, 역시 그냥 해본 소리인거지? 뭐, 당장은 아쉽지만 언젠가는….”
“그래서.”


세렌이 불쑥 끼어들었다. 리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방금까지 잠시 꺼졌던 불이 다시 활활 타오르는 게 보였다. 내가 괜히 말 붙였나? ‘언젠가는’이라는 말은 하지 말걸 그랬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해요, 에녹.”


뜻밖의 화살이 날아온 건 옆자리였다. 이름이 불리자 에녹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흘깃 보았다. 세렌은 잔뜩 뜸을 들이다가 리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이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는 네가 있어야 해, 리오.”


순간, 긴장감은 다시 깨졌다. 세렌은 다시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 둘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렸다. 천재 디렉터 세렌 베일. 그녀의 무모한 카리스마 앞에서 결국 두 남자는 웃음 섞인 체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두 남자는 항복을 선언했다. 셋은 아침식사도 잊은 채, 해가 중천에 떠올라 텐트 위로 강하게 내려앉을 때까지 세렌의 작전을 들었다.


“우선, 전반적인건 옛날에 에녹이 시도했던 방법과 다르지 않아요. 더스트 사람들의 행동을 기록하는거에요.”

세렌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남녀노소, 장애 여부 상관없이 누구나, 자주 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행동들. 걸음걸이나 손짓, 농사나 물긷기, 심지어 무심코 건네는 말까지도. 공식 구역 사람들은 보통 하지 않는, 더스트 사람들 특유의 패턴들을 모아서 정리하면 돼요.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들어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중에서 그럴듯하고, 성과라고 불릴 만한 것들을 추려내는 거예요. 나머지는 버리고.”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눈빛은 강렬하게 빛났다.
“그다음, 에녹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렇게 선별된 행동들을 링크에 심어 넣어, 이브가 성과로 인식하게 하는 거죠. 누락된 이들의 삶을, 더 이상 0으로 만들지 않게.”


정적이 흘렀다. 에녹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낮게 중얼거렸다.

“… 확실히 가능성이 없진 않네. 전에는 내가 임의로 성과를 끼워 맞추려 했기 때문에 거부당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이야. 그들의 생활 속 행동을 선별해 학습시킨 뒤, 오류가 나기 전에 계속 반복하게 만들면, 이브도 끝내 성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해줄 건 단 하나.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열어주는 것. 나머진 사람들이 스스로 자리를 잡을 거야. 문제는… 그 틈을 찾아내는 일이겠지.”


곧바로 리오가 거들었다.
“아침부터 다짜고짜 불러낸 이유가 있었네. 장난이 아니었어.”


두 남자의 호평이 이어졌다. 세렌은 빙긋 웃었다.
“이건 우리 셋이 아니면 못해요.”


리오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는 더 이상 의심도 혼란도 없었다. 오히려 흔들림 없는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에녹도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좋아, 나도 함께하겠네. 하지만… 이브는 결코 만만치 않아. 각오는 단단히 해야 할 거야.”


그들은 곧바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폭풍처럼 지나간 며칠 뒤, 제68 더스트 사람들과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특히, 몇 년을 이곳에서 지내며 사람들과 정을 나눴던 에녹은 감회가 남달랐다. 마을 사람들 역시 그를 향한 마음이 깊었는지, 대부분이 경계선까지 나와 배웅했다. 누군가는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기도를 외듯 축복을 빌어주었다. 햇살은 부드럽게 내려앉았고, 공기는 맑고 향긋했으며, 길가에 핀 작은 꽃들은 바람에 몸을 흔들며 그들을 배웅하는 듯했다. 한없이 평화로운 풍경. 하지만 세 사람은 알고 있었다. 이 고요함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루미야! 무어 아저씨!”


며칠 간의 고단한 여정 끝에, 그들은 제3 더스트로 무사히 복귀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사람들이 달려 나와 손을 흔들며 그들을 반겼다. 반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세렌에게도, 에녹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공식 구역에서는 긴 여행이란 추방이나 이주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번 추방되었다가 돌아오는 사람들은 기다림은커녕 싸늘한 시선이 주어지기 일쑤였고, 그래서 대부분은 차라리 다른 구역으로 흩어지길 택했다. 그러나 이곳은 달랐다. 에녹은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 발을 딛는 땅임에도, 환영의 손길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물론 리오와 세렌 덕분이었지만, 늙은 그의 눈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젖어들었다. 세렌과 리오는 그를 곧장 마을회관으로 안내했다.


원래대로라면, 세렌이 처음 이주했을 때처럼 ‘환영파티’라는 이름의 시험을 치러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건 두 사람의 배려였다. 에녹이 당당히 이 마을의 일원으로 소개될 수 있도록, 시험 대신 환영의 자리를 만들어준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분주히 모여들었다. 어느 정도 인원이 모이자, 리오가 앞에 나섰다.

“급작스러운 환영파티도 파티니까요. 우선 건배부터 할까요?”


리오다운 첫 멘트였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지 싶으면서도 자연스레 잔을 손에 들었다. 리오가 큰소리로 외쳤다. “자, 새로 온 마을 주민 에녹 리븐을 위하여!”


리오의 한마디를 시작으로 어설펐던 파티는 본격적으로 무르익었다. 오랜만의 휴식일이기도 했으니, 세렌도 마음을 놓고 잔을 들었다. 물론 그녀 자신의 환영파티만큼 떠들썩하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웃는 얼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리오가 다시 사람들을 주목시켰다.

“여러분, 오늘의 진짜 주인공을 소개하겠습니다. 에녹 리븐입니다.”


에녹은 조심스레 앞으로 나왔다. 낯선 시선들이 일제히 자신을 꿰뚫는 순간, 그는 고해성사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손끝이 떨렸다. 리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떨림은 조금 가라앉았다.


“이렇게 과분한 환영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회관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져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저는… 루미아 출신입니다. 여러분을 억압하던 체제 속에서 누구보다 혜택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브를 지금의 시스템으로 완성시킨 기술자입니다.”


순간, 회관이 얼음처럼 굳었다. 간간이 들리던 웃음소리도, 잔 부딪히는 소리도 사라졌다. 세렌과 리오는 서로를 잠시 바라봤다. 사실 그들은 에녹이 이브의 기술자였음을 밝히겠다는 폭탄발언을 한 뒤로 쭉 긴장상태였다. 바로 이런 상황을 우려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완강했다. 더 이상 자신을 숨기고 싶지 않다고, 새로운 길 앞에선 진실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결국 지금, 그 선택의 대가가 닥쳐온 것이다.


“이브를 완성시켰다고?”
“그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게 당신이란 말이야?”


회관 곳곳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야유가 튀어나왔고, 분노는 금세 고함으로 번졌다.

“나이 들어 쫓겨나니까 이제 와서 더스트에서 살겠다고?”
“사람들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 서 있는 거야!”


그때였다. 한 여자가 앞으로 나와 에녹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우리 엄마는… 당신이 만든 그 거지 같은 시스템 때문에 치료도 못 받고 죽었어!”

“그건 이 분 때문이 아니라—!”


세렌이 에녹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손짓했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주저앉은 여자의 눈높이보다 더 낮게 허리를 숙였다.

“맞습니다. 제 손으로 만든 것들이 누군가에겐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간 칼이 되었고, 일상을 묶어버린 족쇄가 되었고, 고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에녹의 목소리가 떨렸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 과거를 이곳에서 씻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여러분을 잊고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그 다짐으로 스스로의 링크를 끊은 지 벌써 40년이 흘렀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야유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한 노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주름진 손으로 에녹의 손을 꼭 잡았다.

“우린, 그런 고백을 들어본 적조차 없었소. 말만으로 세상이 바뀌진 않지. 하지만… 이런 고백을 꺼내놓을 용기, 그 자체가 고맙소.”


정적이 흘렀다. 곧, 훌쩍이는 소리가 회관 구석구석을 채웠다.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자리엔 조금씩 수용의 기운이 스며들고 있었다. 에녹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세렌과 리오도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에녹의 일은 잘 수습되었지만, 해킹 계획만큼은 주민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붙여졌다. 세렌, 리오, 에녹ㅡ단 세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혹여라도 정부에 신원이 노출된다면 마을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낮에는 밭을 매고, 아이들을 돌보며 마을의 한 구성원으로 조용히 섞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마을회관 뒤편 작은 창고에 불빛 하나 없는 채 모였다. 습기와 먼지 냄새가 가득한 그곳에, 오래된 노트북과 몇 가닥의 전선이 이들의 모든 희망을 대신했다. 노트북은 리오가 애쉬번에서 목숨 걸고 훔쳐온 것이었다.

리오는 주민들의 행동을 기록했고, 세렌은 그것을 데이터로 정리했다. 에녹은 최신 이브 구조와 변경된 프로토콜을 풀어내며 작업을 주도했다. 세렌도 자신 몫의 작업이 끝나면, 단순한 기초 코딩을 도우며 그의 곁을 지켰다. 그러나 리오는 기계 앞에 앉으면 늘 머리가 하얘졌다.


“진짜, 이건 볼 때마다 머리 아파. 난 그냥 망이나 볼게.”
리오가 한숨을 내쉬자, 세렌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넌 감시랑 타이밍. 그런 건 네가 최고잖아. 리오 없으면 우리 진짜 위험하다니까.”

에녹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는 어렸을 때 비기록자가 되어 코딩 교육을 못 받은 것이 한이라며 입술을 삐죽이다가도, 곧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세 달이 흘렀다. 이제 햇살은 뜨겁게 내리쬐었고, 매미 소리가 거리마다 가득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창고 안에서는 밤마다 긴장된 숨소리만이 울렸다. 계획은 예상보다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브의 보안 체계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자동화된 적응형 방벽은 단 하나의 패턴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시도할 때마다 반응 속도는 기괴할 정도로 빨라졌다. 그렇게 실패가 몇 차례 반복된 뒤, 세렌이 우연히 작은 균열을 발견했다.


“여기. 자정 직전 7초 정도.”
세렌이 손가락으로 로그를 가리켰다.
“시스템이 백업을 위해 스스로 잠깐 멈추는 순간이에요. 그때라면…”


에녹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자료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7초… 단 한 번의 입력과 출력. 그리고 그 사이에 흔적을 지워야 해. 이번에 실패하면 끝이네.”


세렌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시스템 패치가 있어요. 마침 장마철이니 그날이 적기예요.”


리오는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공기만으로도 손에 땀이 차올랐다. 7초 안에, 말 그대로 빛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에녹은 결전의 날이 정해지자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의 손끝이 날렵하게 움직였다. 세렌과 리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결의가, 그 좁은 창고 안을 가득 메웠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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