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아 무슨 점심이야…’
속으론 찡얼찡얼거리면서
“네 이따가 뵙겠습니다.”
겉으론 웃는 얼굴로 교수님께 호응했다.
누가 독극물을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가기 싫었는지…
혼자 가는 건 더더욱 싫어서
가방고리 달고 가듯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약속 시간에 맞춰 발걸음을 뗐다.
ㅡ
“야 교수님이 밥 사주시는 거야? “
“사주시니까 먹자고 하겠지. 설마 학생한테 사달라고 하시겠어?? “
“근데 너한테 밥을 왜 사주셔?”
“나도 몰라. 가보면 알겠지. 혹시 나 혼나면 옆에서 실드 좀 쳐줘. “
ㅡ
교수님은 우리에게 교직원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교직원 식당은 학생 식당과 바로 옆에 있는데도
교수님들을 마주치기 싫어서 항상 피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억지로라도 가게 되었으니
교수님이 내게 뭐라고 하는 것보다
학생 식당과 다른 점이 대체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역시 음식에는 진심인 나였다.
그때 메뉴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가격이 1000원가량 더 비쌌던 교직원 급식은 확실히 학생 식당과는 차이가 있었다.
교수님과 마주 보는 자리에 착석해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메뉴를 하나씩 둘러보는 것이었다.
역시 음식에는 진심인 나였다.
그래도 예의는 부모님께 잘 배운 덕에
교수님이 먼저 수저를 드시길 잠자코 기다렸다.
내 모습은 마치 ‘기다려’를 하고 있는 강아지 같았다.
곧 ‘먹어’라는 명령이 떨어지길 바라며.
교수님은 아무 말없이 수저를 드시고는 음식을 한 입 베어 무셨다.
‘이제 먹어도 되는 건가?‘
‘하실 말씀이 있어서 부르신 걸 텐데 기다려야 하나?’
아무리 음식에는 진심이더라도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나였다.
”왜 안 먹어. 얼른 먹어. “
교수님이 식사를 하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수저를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교수님!”
역시 내 모습은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불편한 마음으로 밥을 먹으러 왔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입을 열심히 움직이며 배를 채우고 있었다.
ㅡ
어느 정도 식사를 하니
교수님께서 본론을 꺼내기 시작하셨다.
”도무지, 너 이제 한 번만 더 지각하면
F학점인 거 알아? “
사실 몰랐다.
교수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
내 친구는 옆에서 빵! 터져서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앜ㅋㅋㅋㅋㅋ 얘 F에요?!! 너 이제 인생 망했어!!!“
낙엽만 굴러가도
까르르까르르 웃는 게 여고생이라던데,
얘는 아직 여고생을 못 벗어났나 보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청 행복하게 웃는다.
저런, 남의 불행에 기뻐하는 자 같으니라고!
혼자 신이 난 모습을 보아하니
교수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친구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야 그만 웃어! 그렇게 재밌냐?!”
“아니~ 학교를 빠진 것도 아닌데
지각했다고 F라잖아!! 나만 웃겨?!”
친구의 웃음이 끊이지 않자
나와 교수님까지 같이 웃었다.
ㅡ
웃음이 끝나갈 때쯤 교수님께서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다.
“내가 과제를 줄게. 다른 애들보다 과제를 하나 더 해오는 거야. 할 수 있겠어?“
“네. 할게요.”
내가 과제를 한다고 해도,
학점이 뒤집어질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어차피 D를 맞을 형국이었다.
이 과제는 그저 F만은 면하게 해주려고 하는 교수님의 따뜻하고도 무서운 마지막 경고장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까라면 까야하는 게 아니던가,
‘그냥 F 주세요.‘
혹은
‘그냥 D 주세요.’
내가 감히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그 이후로 학교에 지각해서 F 맞을 위기에 처했던 적은 없었다.
F를 맞든, D를 맞든, A를 맞든
남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보잘것없는 한 학생을 들여봐 준 교수님 덕이었을까.
아님
학점과 상관없이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내 모습을 알아차린 교수님의 애정 어린 시선이었을까.
ㅡ
교수님이 나를 특별히 챙겨주고 좋아해 주셨던 건 아니지만, 10년이 지난 아직도 매년 내 생일이 되면 축하한다고 연락을 주신다.
그때마다 나는 그날의 점심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늘 감사함을 잊지 못한다.
어둡고 힘든 길인 것만 같은 요즘의 교단에서
조금이라도 따뜻했던 나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음에
또 다른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