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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랑 Feb 12. 2020

조금 늦어도 괜찮아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쓰는 말

  

  2020년 제야의 종 소리를 들은 지 12시간도 되지 않아 내가 한 일은 2마트에서 별도의 재료 손질 없이 끓이거나 볶기만 하면 되는 간편식 시식을 하는 것이었다.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꼬박 하루에 8시간 이상을 냉기를 뿜어대는 냉장고 앞에서 시식을 해야 했는데, 시식이라도 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시식 마저 할 수 없는 날이면 전쟁터에서 총을 잃은 병사처럼 우두커니 서서 판촉 멘트를 외쳐야 했다.


  형편없는 점심식사와 퉁퉁 부은 다리를 뉘일 곳도 없는 열악한 휴게실, 목 뒤에 일회용 손난로를 넣고 앉아서 잠을 청했던 기억이 난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서른 살 언니와 나는 매일 서로를 위로했는데, 우리를 제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마치 슈퍼마리오를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유니폼과 베레모였다. 그래도 그 복장이 좋았던 이유는 어린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잠시나마 스타가 된 느낌이 들었다.


  거의 10시간 동안 묶었다 풀어서인지 부스스한 머리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 그래도 나름의 소확행을 즐기기 위해 50% 세일하는 즉석식품을 각자 품 안에 안고 마을버스를 탔던 그 날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 없는 마을버스 안에서 이름 모를 동지애를 느꼈고 직장 없는 우리의 처지가 슬프기보다는 반대로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묘한 산뜻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면접에 가면 가장 먼저 듣는 말이 '나이'에 대한 질문이다. 학교를 남들보다 오래 다닌 것에 대한 물음, 그 밖에도 예민한 질문 중 대부분은 기간과 경력, 그리고 시간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이건 분명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마트에서 열흘 동안 동고동락했던 착한 심성의 언니도, 그리고 어디에선가 내 글을 보고 있을 당신도 들을 이야기다.


  나 또한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일개 개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주류와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라서 조바심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 인생은 누가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늦었다고 내 인생에 잠시 균열이 생길지언정, 균열이 생긴 부분에 시멘트를 바르고 보수공사도 해주고 그러면서 사는 거다. 29만 원이 전재산이라던 양반이 집권하던 시기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지금도 롱런하는 이유다.


  너무 흔해빠진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취업준비생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기업이 나의 나이를 가장 큰 가치로 여기기보다는 나의 능력을 매리트라 여기게 하자. 개인적인 경험상, 나이에 맞는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능력, 유연함을 어필하기만 한다면 채용에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서류에서 탈락하면 어쩔 수 없지만, 면접까지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업은 당신을 잠재적인 회사의 구성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조금 늦어도 괜찮다. 자기 계발서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영혼 없는 되뇜이 아니라 기름기와 허영을 빼고 담백하게 당신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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