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세 여자’를 읽고
친구가 작년부터 추천해준 세 여자를 드디어 완독했다.
작년에 처음 도전했을 때 앞장만 겨우 읽었던 이유는 너무 역사적인 소설이라서 잘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의 한가운데 요동치는 삶을 살아가는 세 여자의 삶을 이해하기에는 나의 지식수준이 너무 얕았달까
그런데 마침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도 했겠다, 이 책이 떠올라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으니 이렇게 술술 읽히는 걸 보면 나의 지식이 부족했던 게 맞는 거 같다.
소설을 읽으면서 수십번씩 책에 "롸?" "으잉?" "갑자기?"라는 말들을 썼다. 그만큼 이해되지는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고향에 본처가 있는 단야와 쉽게 사랑에 빠지는 명자, 그런 명자를 아무렇지 않게 이해하는 세죽과 정숙, 감옥에 간 원근을 두고(심지어 애가 둘인데)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정숙, 소련에서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 세죽과 단야 등 서술하자면 끝도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을 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었다. 저렇게 척박하고 외로운 삶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 않았을까.
이 책을 완독한 나의 소감은 누구도 완벽히 사랑할 수도 완벽히 미워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에겐 특히 정숙이 그러했다. 누구보다 투쟁적인 그이나, 나역시 초반에는 헌영이 그를 비판하듯 그녀가 태생이 귀한 부잣집 딸이라서는 그런 것 같았다. 그를 한없이 사랑하고 뒷받침해줄 수 있는 아버지가 있었기에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마음이 가지 않았다. 중반으로 가면서 사랑은 사랑대로 누리고, 힘든 일제강점기에 미국으로까지 유학을 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역시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지막을 읽으면서 결국 모두가 흔들릴 때에 중심을 지키고 자기의 길을 간 사람은 정숙이 유일하다는 것을 알았다. 책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간 사람이라고 그를 표현하는 것을 보며, 아 이것이 주체적 삶의 중요성이구나를 깨달았다. 물론 그가 부유한 삶 속에서, 부모의 지지 속에서 살아갔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던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부유한 삶이라고 하여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가 쉽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자격지심에 쌓인 사람은 "넌 어차피 안락한 삶 속에 산다", " 언제든 도망갈 구멍이 있다" 라며 쉽게 부자를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느다. 부유하고 안락한 삶 속에서 그 알을 깨고 나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가난한 삶을 이겨내는 것과 부유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운지의 경중을 가리는 것은 옳지 않다.(할 수도 없고) 그저 그 둘이 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변화가 있고, 주체적인 삶을 상호간에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아직 이것이 쉽지 않아 처음에는 정숙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그녀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랑을 넘어 사상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순간들이 있다. 자신의 신념을 쉽게 버리는 이도 있고, 자신의 신념에만 지나치게 확고한 이들고 있다. 또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으나 여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봉건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중적인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완벽히 사랑할 수도 완벽히 미워할 수도 없었다. 수없이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에 어찌되었든 답을 찾고 나라를 위해 많은 것을 바친 사람들이,,,(매국노는 제외) 박헌영의 말처럼 사람에 대한 용서가 아닌 시대에 대한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메시지는 한 순간의 판단만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이야기인 것 같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이 시점이 아닌 역사 속에서 내려지는 것이니.
누구도 완벽히 사랑할 수도, 완벽히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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