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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윤 Mar 31. 2019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과소비

처음부터 이렇게 구질구질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덤덤한 마무리가 문제였는지 뒤늦게 후폭풍이 몰아쳤다. 도대체 연애가 뭐라고 모든 노래 가사가 내 얘기 같고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늘어놓는지, 한 줌의 위로도 없이 무수히 많은 공감만 남겨둔 채 누구나 그렇듯 홀로 이별의 아픔을 견뎌야 했다. 결국 첫 연애의 첫 이별에 어쩔 줄 몰라 곱씹고 곱씹다 결국 이런 짓까지 하고 말았다. ‘전 남친에게 띄우는 꽤 오래 만날 줄 알았던 우리가 헤어진 이유’로 시작하지만 전 남친이 이 글을 봤으면 하는 마음 반 안 봤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그림과 글을 기록한다.

용돈 받는 처지에 남자 친구 생일 선물 좋은 거 해주겠다고 난생처음 명품 편집숍에 들어갔다.

의상을 전공한 남자 친구는 어찌나 까다로운지,

이거 사면 안 입을까, 저거는 너무 화려한데, 이거는 너무 평범한데.

매장 안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처음 눈이 갔던 푸른색의 단정한 셔츠를 샀다.


생일 당일 준비한 선물을 건넸을 때 그 포장을 보던 초롱초롱한 눈빛과 “어! 여기서 샀어?” 하며 반가워하던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안에 내용물을 보고 잠깐 멈칫하던 그 모습까지 전부 기억한다.

한 번도 내 취향이 남다르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름 미학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에겐 정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게 약 0.5초 동안 서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까지  한 번? 입었나. 

언제 한번 무심한 척 셔츠의 행방을 물어봤을 때 단추가 하나 떨어져 못 입었다는데,

의상을 전공한 친구의 단추가 떨어져 셔츠를 못 입는다는 슬픈 변명을 끝으로 애써 잊고 지냈다. 이제는 좋아할 만한 선물을 너무 잘 알지만 그날의 선물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아쉬운 마음이 크다.


최고의 재료로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에 유기농 채소와 1등급 한우, 알록달록 과일들, 향이 좋은 허브와  독특한 향신료를 가득 바구니에 담았다. 계산할 때 보니 얼추 유명 식당에서 점심 코스요리 먹을 가격은 되었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재료 손질부터 본격적인 요리까지 맛도 안 보고 정신없이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시던 부모님께서는

“평소 요리도 안 하는 애가 남자 친구 도시락 싸준다고...... 엄마도 안 해줬으면서.”

남자 친구의 혹평 때문이었을까 그 이후 남자 친구를 위한 도시락은 접었지만 가족을 위한 요리는 종종 했다.

아, 얼마 전에도 부모님의 도시락 앙코르 요청에 장을 잔뜩 봐서 요리를 했다.






앞으로 이어질 그림과 글은 이별로 가는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이다.

헤어짐의 결정적인 이유가 없어 드라마틱 한 재미는 없지만 당사자들은 꽤나 심각했던 과정이 담겨있다.

‘이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이 맞을 수도 있을 만큼 극 사실주의로 풀어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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