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렇게 구질구질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덤덤한 마무리가 문제였는지 뒤늦게 후폭풍이 몰아쳤다. 도대체 연애가 뭐라고 모든 노래 가사가 내 얘기 같고 구구절절 맞는 소리만 늘어놓는지, 한 줌의 위로도 없이 무수히 많은 공감만 남겨둔 채 누구나 그렇듯 홀로 이별의 아픔을 견뎌야 했다. 결국 첫 연애의 첫 이별에 어쩔 줄 몰라 곱씹고 곱씹다 결국 이런 짓까지 하고 말았다. ‘전 남친에게 띄우는 꽤 오래 만날 줄 알았던 우리가 헤어진 이유’로 시작하지만 전 남친이 이 글을 봤으면 하는 마음 반 안 봤으면 하는 마음 반으로 그림과 글을 기록한다.
이별 후 가장 암담했던 건 정리였다.
삼청동 데이트 중 별 뜻 없이 선물 받은 수국 한 다발,
(언제나 북적대는 주말 삼청동에서 불특정 다수의 부러워하는 시선과 수군거리는 소리는 정말 짜릿하다)
의상을 전공하고 처음으로 만들어준 여성 코트,
(그때까지 주머니 다는 법은 안 배워서 코트에 주머니가 없다)
여행 중 생각나서 사준 무민 다이어리,
(다이어리 일정의 대부분은 그 친구와 데이트, 데이트, 퐁당퐁당 기념일, 끊임없는 데이트)
취직하고 선물해준 샌들,
(전혀 귀엽게 생기지 않았지만 신으면 귀여울 것 같다며 선물해줬다)
명함, 피규어 등
길었던 연애 기간만큼이나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크고 작은 선물들 가운데 가장 정리하기 어려웠던 건 핸드폰이었다.
이 친구 눈에는 내가 이렇게 보이나? 싶을 정도로 정말 잘 찍어준 사진 몇 장은 솔직히 정리하기 싫었다.
이별과 함께 내 인생의 리즈시절도 끝나는구나 싶은 마음도 들고
이럴 거면 예쁘게 화장한 날은 혼자 찍은 셀카도 많이 찍어둘 걸 하는 마음도……
12월이면 그 해 찍었던 예쁜 사진들을 모아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앨범들은 그 친구 집에 보관해서 행방불명이다.
앞으로 이어질 그림과 글은 이별로 가는 행복했던 순간의 기록이다.
헤어짐의 결정적인 이유가 없어 드라마틱 한 재미는 없지만 당사자들은 꽤나 심각했던 과정이 담겨있다.
‘이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이 맞을 수도 있을 만큼 극 사실주의로 풀어가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