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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윤 May 17. 2021

달리기에는 재즈

정확하진 않지만 반팔, 반바지를 입은 계절부터 언니와 나는 오후 7시 30분이면 아파트 1층으로 나가 30분씩 달리기를 했다.

이름하여 달빛 달리기 단.

언니가 A조 근무하는 날이나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나갔지만, C조 근무하는 날이나 약속이 있는 날이면 집에서 간단한 유산소 운동과 근육운동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러다 언니 없이 나가볼까? 하는 용기에서 시작된 솔로 달리기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이제는 큰 용기 없이도 할 수 있는 하루 일과가 되었다.


이날은 아침부터 엄마표 얼큰한 어묵국과 소시지 반찬, 시금치나물, 팥죽, 과자 등을 먹어  맹장수술 환자처럼 아랫배를 부여잡고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있었다.

오후 3시.

하루를 과식의 고통으로 날리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오늘은 최소 500칼로리가 소모되는 달리기를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니 장비도 제대로 갖춰야 할 것 같아, 처음으로 무선 이어폰을 챙겨 오후 4시 즈음 아파트 1층으로 내려갔다. 아직 소화가 덜되어 몸은 무거웠지만, 바깥바람이 좋으니 재즈 정도가 적당하겠다 싶어 비교적 최근에 담은 앨범을 일시 정지하고, 언제나처럼 종이 분리수거함 앞에서 무릎과 발목 스트레칭을 했다.


좋았어, 슬슬 뛰어보자!

이어폰을 두 번 터치함으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앞으로 3보 정도 전진했을까, 내가 담은 재즈가 공연 버전인 것을 그제야 알아채 굉장히 난감했다.

대충 장르만 보고 담았던 음악이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은 공연 버전이라니.

잠시 걸음을 멈춰 재생목록을 수정할까 싶었지만 이미 시작한 달리기를 멈추기 싫어 한 바퀴만 참아보자는 마음으로 애써 귀를 막고 달렸다.

그렇게 아파트 후문까지 달리고 언덕을 내려 다시 언덕을 오르고 출발지인 집 앞의 분리수거함에 도착했다.

꽤 속력을 내서 달려서인지 한 바퀴 만에 숨이 찼지만 저녁 8시면 시작되는 글쓰기 모임을 생각해 쉼 없이 두 바퀴를 향해 달렸다. 아직 이른 오후여서일까 유난히 활기 가득한 놀이터 풍경과 설렁설렁 움직이는 아파트 입주민들, 최근 주차장 공사로 바쁘게 방향 지시등을 움직이는 경비 아저씨들이 보였다.


정문 앞에서 수고하시는 경비 아저씨를 세 번 즈음 마주했는지, 혼미한 정신에 마스크 안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입안 가득 고인 침과 지친 호흡을 달래 봐도 토기가 올라왔다.

아직 200칼로리밖에 태우지 못했는데, 갈 길이 멀어 애써 다른데 신경을 돌리고자 눈에 보이는 풍경을 더욱 집중해서 바라봤다. 그러자 보도블록 가장자리로 늘어선 단풍나무들과 거슬리던 재즈가 들리기 시작했다. 빨갛고 노랗게 물든 단풍잎과 은행잎들, 자신감 있는 여성 솔로 가수의 목소리와 즉흥적인 연주.

이른 오후 단지 내에서 단풍을 보며 재즈를 듣는 사람이라니 스스로가 굉장히 성공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부터 성공한 자의 가면을 쓰고 지친 체력을 붙잡아가며 열심히 칼로리를 태웠다. 같은 단풍나무가 다섯 번은 반복되고 더 이상은 무리인가 싶을 때 즈음 공연의 끝을 알리는 박수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전에도 들렸을 박수소리가 마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앞둔 나에게 보내는 박수갈채 같아 벅찼다. 너무 감상적인가 싶지만 또 그만큼 감동적이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문내고 싶은 환희였다.

가을날 감상에 취해 마지막 한 바퀴를 목표로 뛰고 있을 때, 아파트 후문 쪽에서 빈 휠체어를 끌고 나에게로 걸어오는 중년과 노모를 마주했다. 두 사람은 이른 오후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달리는 나를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나는 노모의 시간이 되었을 때, 그때도 이렇게 혼자일까 겁이 나고 울적했는데.

해피앤딩 인척 하는 새드 앤딩의 어느 가을날 달리기였다.

+

불행의 크기가 너무 작아 당황스러우셨다면 저 또한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소한 일상에서 매일매일 불행을 마주하고 남들 쉽게 넘길 수 있는 가벼운 일 불행을 발견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아, 피곤한 성격 탓에 할 말도 많아 불특정 다수에게 수다쟁이가 되는 특징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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