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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서윤 May 19. 2021

뭐 이딴 취미가 다 있담

아빠는 젊은 날 브랜드 있는 제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나이키 운동화, 마란츠 오디오, 마이클 잭슨 LP 등.

그중 남아있는 건 고장 난 음향 기기와 노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LP 몇 장이 전부다.

크기도 어마어마한 이 음향 장비들은 제 기능은 하지 못해도 아빠의 보물 257호란 이유로 신줏단지 모시듯이 방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30년 가까이 고이고이 모시고 있다.


기약 없이 실평수를 좁게 쓰고 있는 우리 집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취미를 가져보기로 한가한 어느 오후 결심을 세웠다.


먼저 검지 하나 닿기 싫을 만큼 먼지가 잔뜩 쌓인 스피커부터 턴테이블, 앰프, 오디오, 각종 전선들을 휴지와 물티슈 알코올 솜을 총동원해 박박 닦았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누워 바나나를 드시고 계신 아빠에게 다가가 저 수많은 기기 중 고장의 원흉이 어떤 것인지 물어 연결을 해지하고 서울에 있는 수리점에 찾아가 골칫덩이를 맡겼다.


장비가 입원해있는 동안 문제의 방에 있는 창가에 캠핑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하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둘러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올 음악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다시 숨 가쁘게 교보문고, 알라딘 등 사이트를 찾아 헤매며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디즈니 OST도 나쁘지 않은데, 토이스토리로 할까?’

그러다 몇 년 전 인상 깊게 본 영화 베르나르도 베르돌루치의 마지막 황제 LP를 네이버 쇼핑에서 발견했다.


위스키를 마시며 마지막 황제 OST를 감상하는 나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져 이건 사야만 했다. 토이스토리고 뭐고 더 이상 볼 것도 없이 당장 주문했다.


다음 주 아빠의 고장 난 보물 257호는 정상적으로 퇴원 수속을 맞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나의 마지막 황제 LP.

어, 약간 느낌이 세한데.

이게 뭐지.

왜 이렇게 LP가 헛돌지.

턴테이블에서 LP가 디스코 팡팡처럼 팡팡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빠의 소장품 [84년도 강변가요제] LP를 넣어보자 맞춤정장처럼 딱 들어맞았다.

사막오장의 J에게가 흘러나온다.

이게 뭐야.

나의 LP는 구멍이 너무 커서 아빠의 턴테이블에 안 맞았다.

용어는 모르겠고,

화는 나고,

당장 음악은 들을 수 없고,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혼미한 정신으로 유튜브며 네이버 구글에

엘피 구멍

엘피 구멍 안 맞음

엘피 구멍 넓음

별별 검색을 해가며 알리익스프레스에서 레코드 어댑터라는 것을 구매했다.

처음 구매하는 알리익스프레스는 배송이 이 주일이나 걸리는 곳이라는 걸 주문하고 3일 후에 알게 되었다.


마지막 황제.

오기가 생겨 플로, 멜론, 유튜브로 절대 안 찾아들었다.

이주가 지났다.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 늦은 저녁, 현관문 앞에 손바닥보다 작은 회색 비닐봉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왔구나.

레코드 어댑터.

강아지가 개껌을 뜯듯이 미친 듯이 손으로 뜯어재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댑터를 들고 경보하듯이 문제의 방에 들어가 마지막 황제 LP를 꺼냈다.

비닐을 벗겨 레코드 어댑터를 끼우고 턴테이블에 또 끼웠다.

뭔가 이상했다.

원래 이렇게 뻑뻑한가.

이상하게 잘 안 들어갔다.

기분 탓이겠지.

xxs 사이즈를 숨을 힘껏 들이마시고 단추를 잠그는 느낌으로 레코드 어댑터를 턴테이블에 끼웠다.

그런데 음악은 안 나오고 바늘이 윙윙 헛도는 것이 아닌가.

뭐야.

짜증이 났다.

이거 제대로 고친 거 맞아?

뭐가 문제야.

잠깐.

잠깐.


나의 마지막 황제 LP가 뭔가 다르게 생겼다.

아빠의 강변가요제 LP는 검은색인데 나의 마지막 황제 LP는 반짝반짝 은색이다.

아빠의 강변가요제는 줄무늬 선이 있는데 나의 마지막 황제는 광택이 난다.

순간 믿기 힘든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내께 만약 LP가 아니라면.

이 크기에 이 모양에 LP가 아닐 수가 있나.


그럴 수가 있다는 걸 주문 배송을 자세히 들여다보고서야 알았다.

LD

LaserVideodisc

세상에 그런 게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LD 플레이어를 검색해도 거의 나오지도 않는 것을.

+

최근 파주 출판 단지 중고서점에서 LP가 무더기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곤 너무 반가운 나머지 30분가량을 들여다보다 우주 관련 LP를 하나 골랐다.

집에 와서 보니 LD였다.

이 정도면 LD 수집을 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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