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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Sep 30. 2023

큰 집에 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명절은 내게 연휴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난다는 설렘과 그리움보다, 큰 집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아직은 천지를 모르고 뛰 놀아야 할 10살의 나는 명절이면 얌전히 앉아 있는 법을 배웠고, 어른들의 일 손을 도와야 했고,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혼이 났다. 내게 큰 집은 항상 무서운 곳이었다. TV에서 봤던 민족의 대축제 같은 명절은 내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엄마와 아빠의 이혼을 기점으로부터다. 엄마의 여자 형제들이 많았던 외가에는 늘 시끌벅적하고, 내가 즐겁게 뛰어놀 수 있었다. 반면에 아빠의 남자 형제들이 많았던 친가는 대부분 무뚝뚝했고, 장난치거나 살갑게 말을 건네는 어른이 없었다. 물론 친가에 갔을 때는 제사를 치르기 전이라 할 일들이 많았고, 외가에 갔을 때는 제사가 끝난 뒤 쉬면서 음식을 나눠 먹었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가 좀이 쑤시는 나이에 제사는 고역이었고, 친가가 더 무겁고 딱딱하게 느끼도록 하는 데 일조를 했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의 이혼으로 내게 가족은 친가만 남게 되었다.


이혼 가정이 그리 흔하지 않던 2000년, 10살이 되던 해에 나는 아빠와 남동생과 살게 되었다. 흔치 않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그 당시에 한 부모 가정에서 산다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지금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학년이 올라가면 가정환경 조사를 했다. 부모의 소득과 직업, 주소, 부모와 본인의 장래 희망 등을 빼곡히 적어서 제출해야 했다.

ⓒ Edo Nugroh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따라서 학기 초에는 늘 '나 혼자 007'이 시작되었다. 한 부모 가정이라는 것을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숙제로 받은 가정환경 조사지는 제때 제출한 적이 없었다. 조사지를 작성하고도 제출하지 않아 벌로 청소를 하거나, 매를 맞고 나서 친구들 몰래 교무실에 찾아가 선생님에게 따로 제출해야만 했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한 부모 가정이라는 것을 서슴지 않고 밝히게 되었지만, 학생 때는 한 번도 이 비밀 임무를 들킨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학교가 아닌 큰 집에서는 비밀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심지어 아빠의 형제들은 아빠를 포함해 남자가 넷, 여자가 둘이었다. 우리 집의 경우는 친가에 남자 형제들이 먼저 모였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까지 총 17명이 모이는데, 음식을 할 줄 아는 사람은 2명이 고작이었다. 막내 삼촌은 당시에 미혼이었기 때문이다. 철이 일찍 들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중학생이었던 사촌 누나는 그때부터 음식을 도왔다. 이 와중에 아빠의 이혼으로 음식 할 수 있는 사람이 3명에서 2명으로 줄었던 셈이다.


큰 집이 무서웠던 이유도 여기 있다. 무뚝뚝한 경상도식 집안 분위기도 한몫했지만, 일상 대화라고는 없었던 큰 엄마가 간혹 다그치듯이 물어보는 엄마의 소식에 답하지 못해서 두려웠다. 정도를 따질 수야 없을 테지만,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힘들었을 테다. 물론 큰 엄마도 내 마음을 해하려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게 엄마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선의로부터의 마음과 명절에 함께 음식 할 수 있는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어떠한 대답도 내놓을 수 없던 10살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큰 엄마는 내게 쏟았던 질문을 삼켰어야 했다.

ⓒ Allgo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남자들도 음식을 하거나, 종류나 양을 줄이거나, 차례상의 음식을 사 오는 것이 맞지만, 그때는 모든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고추가 떨어진다고 혼났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또한 명절답게 음식은 풍족하게 해야 했으며, 제사에 올리는 음식들은 직접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우리 가족들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사회의 통념에 따라 살았다. 현실은 이미 달라졌는데도 말이다.


아빠는 나와 내 동생에게 '너희는 집에 대접받는 손님이 아니다. 가족의 일원으로서 도와야 한다.'라고 했고, 큰 엄마는 '엄마한테 연락 오지 않냐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라고 전화해라.'라고 했고, 전형적인 경상도 집의 과묵한 분위기는 해가 거듭해도 적응될 리 만무했다. 늘 숨이 턱턱 막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큰 집에 가는 것이 싫을 수밖에 없었다.


TV나 주변 친구들의 명절에 즐거운 기억들이 부러웠고, 마구 뛰어놀며 에너지 발산이 필요했고,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다는 것이 적어도 우리 가족들에게만큼은 '흠'으로 보이지 않기를 원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이 모든 것을 감내하기에 아직 어렸다. 그러나 현실은 명절 즈음의 날씨만큼이나 차가웠고, 힘든 상황에 놓인 만큼씩 내가 일찍이 어른이 될 것을 요구했다. 아마 나는 요구에 응하기보다는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것 같다.

ⓒ Manja Vitolic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학교에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의 '까불이'가, 명절에 큰 집에서 만큼은 '얌전한 고양이'가 됐다. 얌전한 고양이가 된 김에 나는 부뚜막에도 먼저 올라가기로 했다. 고등학교 때는 잘하지도 않던 수능 공부를 핑계로, 성인이 되고서는 머리가 컸다는 핑계로, 최근의 감염병이 확산되었을 때는 코로나19 확산을 핑계로 큰 집에 가지 않았다. 이것이 반복되자 명절에 큰 집에 가는 것은 내게 선택의 영역이 되었다.


이번 명절에도 나는 큰 집에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편했다. 나이가 서른셋 인 현재도 큰 집은 그리 달갑지 않은 곳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고 또 조절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어렸을 때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성인이 되고서 한 번은 용기 내서 사촌 누나와 사촌 형에게 모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직면한다 해도 상담기법으로 배웠던 효과처럼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문화는 그 구성원들의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응당 지켜야만 하는 규율과 행동 양식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으면,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 자연스레 행동할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그 결과인 형식적인 것에만 몰두하여 문화가 생긴 이유를 잊으면, 각종 폐단이 생길 수 있다. 명절은 즐거워야 하지만 즐겁지 않은 개인의 내면에 부조화를 일으키고, 필요 이상의 격식으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고, 해야 하는 역할의 과부하로 고통받았던 우리네 가족 이야기처럼 말이다. 명절이라는 문화도 다시금 고민되어야 한다. 명절이 연휴 이상의 의미를 가지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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