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는 대개 '설렘', '싱그러움', '기대에 부푼' 등과 같이 긍정 서술어와 어울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에게 새 학기는 '걱정되는', '주눅 든', '막막한' 등과 같이 부정 서술어와 어울리는 것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나는 우리 가족의 가난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 증명 과정은 결코 자발적이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가해지는 폭행에 가까웠다. 나는 '학생 기초 조사서(가정환경 조사서)'를 매년 제출해야 했다.
가난의 증명 과정은 다른 친구에게 쉬운 숙제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절대 완벽하게 작성할 수 없도록 구성된 퍼즐 같았다. 자신 있게 작성할 수 있던 것은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 주소 정도였다. '가족 관계'라는 항목에서 작성을 건너뛸 수 없도록, '어머니'를 위한 칸이 비어 있었다. 조사서는 3~4인의 전통적 가족을 내게 강요하는 듯했다. 나는 강요받은 가족 형태에 속하지 못한 죄를 짓는 듯했다. 하등 의미 없는 고민임을 알면서도, 더 이상 함께 살지 않는 어머니 이름을 써야 하는지 며칠을 고민했다.
빈칸으로 제출하다 들켜서 '엄마 없는 아이'라고 놀려댈 친구의 예상 가능함이 무서웠다. 내게 며칠 전 혹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살던, 아버지 혼자서 나를 뚝딱 만들었을 리 없으니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이 세상 어딘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머니가 나에게도 있다. 거짓이라도 써서 친구로부터의 놀림과 선생님으로부터의 차별적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은 빈칸으로 낼 수밖에 없던 어머니가 나에게도 있다. 비록 함께 사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끔찍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조사서에는 아버지에 관한 내용도 써야 했다. 육 남매 중에서 둘째 남자로 태어났던 아버지는 중졸이었다. 당시 장남은 공부를 시켜야만 했기에, 아버지는 중학교를 끝으로 목수로서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일 마치고 돌아와 밤늦게까지 책 읽으며 혼자 공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지켰다. 이것이 거짓이 아님은 그간 내가 목격한 아버지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이제는 침침한 눈과 떨어진 체력으로 저녁에 책 읽는 것을 쉽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책 읽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 조사서에는 단 두 글자 밖에 쓸 수 없었다. 중졸.
아버지 직업이 목수라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조사서는 아버지의 직업을 초라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직업(직장명 등 구체적으로)에는 유독 괄호 안에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목수 말고 직장명이 있나?". 아버지는 회사에 소속되어 목수로서 일 했던 적도 있었지만, 직업 특성상 그렇지 않을 때가 많았다. 중졸, 일용직 노동자, 목수. 조사서에 적힌 것을 본 선생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가정 형편도 조사했다. 집에 방은 몇 개가 있는지, 전세나 월세인지, 자가용은 있는지 등이었다. 그렇게까지 조사서 앞에서 발가벗겨지고 나면, 마지막에 우리 집의 경제 상황을 스스로 평가해야 했다. 아버지의 피와 땀 어린 노력을 자식 된 입장에서 심사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럼에도 도출된 결과가 가난임을, '하'에 표기했다. 물론 자격지심임을 안다. 하지만 여기까지 작성하고 나면, 내가 느끼기에 사회가 나와 우리 가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 '김재용 및 그 가족. 가정환경 형편없음'. 쾅쾅쾅. 일종의 선고가 내려진다.
이 조사서를 숙제로 내준 것도 가히 폭력적이었지만, 제출하는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너무도 두려운 것이지만,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이 대하는 선생님 명령이 더 끔찍했다. 맨 뒤에 앉은 학생이 앞으로 걷으면서 오거나, 뒤에서 앞으로 건네어 선생님에게 도달했다. 이 과정 중 장난기 많은 친구 손에라도 들어간다면, 나는 앞으로 "엄마 없는 자식"인 동시에 "가난하고 형편없는 가정에서 사는 아이"가 된다. 형편없음은 당시에 전혀 배려받지 못했다.
나는 그 조사서를 제때 제출한 적이 없었다. "까먹고 집에서 안 가져왔네". 그 당시만 해도 체벌이 허용되었고, 나는 손바닥과 엉덩이를 선생님에게 기꺼이 내주었다. 친구의 계속될 멸시보다는 몇 대 맞고 끝내는 것이 싸게 먹혔다. 꼬깃꼬깃 접어 주머니에 넣어둔 조사서를 교무실에 가서 따로 제출했다. 제출했을 때의 선생님 표정은 아무리 떠올려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은 보통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미리 말하지. 그럼 안 혼나도 됐을 텐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집안이 형편없음을 어떻게 해야, 고작 청소년인 내가 미리 말할 수 있을까'.
끔찍한 것은 그 조사가 단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당시에도 컴퓨터가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스템이랄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가족 환경은 획기적으로 변하지 않는데, 매년 봄이면 다시 조사했다. 학교에서 우리 집안 형편이 지속적으로 가난한지 궁금했던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매년 두려웠고, 선생님에게 맞았고, 친구들의 눈을 피해 몰래 제출했다. 싱그러운 새 학기는 늘 주눅 든 채 지냈다.
형편없는 가정환경으로 막대한 지원이라도 받았다면 모르겠지만, 가난은 증명만 하는 것에서 그쳤다. 도무지 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팔지 못함에도 싸게 먹혔던 것은 체벌을 견뎌낸 내 몸뚱이뿐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가족이나 부모로부터, 친구에게 관심이 옮겨 가는 '청소년' 시기다. 나는 청소년기 시절을 친구에게 상습적으로 거짓말하며 보냈다. 내가 조사서에 썼던 것을 솔직히 드러낼 수 없으니, 엄마가 있고 적당히 가난한 정도의 삶을 연기했다.
학기 시작은 친구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짐을 뜻한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마치 '배우 같은 삶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한다. 작품 들어갔을 때 기준으로 시즌과 비시즌을 나눠 맡은 배역에 몰입하는 것처럼, 학기는 시즌이었고 방학은 비시즌이었다. 나는 학기가 시작되면 '엄마 있는 삶'을 연기하는 배우였다. 삶 전체가 거짓 투성이니까, 그 속에 진실된 관계가 있을 리 없다. 당연히 나는 초/중/고를 통틀어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가 없다. 저마다의 가난은 친구조차 허락하지 않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