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재였다. 어릴 때 부모로부터 영재소리를 한 번도 안 들은 자식이 어디 있겠냐만, 그럼에도 나는 확실히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지나가다 스치듯 본 현수막 전화번호를 입으로 한 번 읊기만 해도 며칠을 까먹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거나, 여자친구의 흘러가는 말을 모조리 기억해 선물을 주다 보니 나는 언제나 섬세한 남자였고, 객관식 위주의 벼락치기 공부로 점수를 받는 것이 어렵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 이혼하기 전까지만 영재였다. 어머니는 나의 기억력을 무기로 삼아 영재 학교에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시험에서 문제를 하나라도 틀리면, 어머니는 모든 문제의 답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풀어야 했다. 나름 영재 준비를, 다른 말로는 공부를 혹독하게 한 셈이다. 그렇지만 내가 영재 학교에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열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이 무너질 듯 힘들었지만, 어떠한 면에서는 나름의 해방감도 있었다. 나는 더 이상 100점짜리 시험지만을 집에 가져가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도 내가 공부를 잘하길 원했지만, 막연한 기대일 뿐 강요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성적까지 꼼꼼하게 챙길 수 없는 가정환경도 한 몫했다. 남자 혼자 남자아이 둘을 키운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집안일이나 돈을 버는 것 마저 오롯이 혼자해야 했다.
성적이 중요한 나이는 다가오는데, 성적은 순위권에서 멀어져만 갔다. 전교에서 등수를 세다가 반에서 등수를 세는 것이 편해질 때쯤, 나는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위에서 강요하는 어머니가 없었고, 지루하고 예상이 가능한 공부보다 매 순간 역동적이고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방황에 끌렸다. 방황은 억압되어 살던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소위 '잘 나가는 친구들'과 어울렸던 때가, 아마도 내 사춘기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엄마로부터의 해방은 나의 방황이 되었다.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고생하는 아버지에게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의 사춘기 반항심은 가족보다는 다른 곳으로 분출했다. 당시 유행하던 헤어 스타일인 '샤기컷'을 하고, 교복도 줄여서 입었다. 나는 '잘 나가는 친구들'과 학교가 끝나면 어울려 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래방에 갔고, 숨겨진 우리네 아지트에서 오토바이를 무면허로 몰래 타기도 했고, 간혹 술도 마셨다. 나는 끝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온전히 기호에 안 맞았기 때문이지, 만약 담배가 기호나 취향에 맞았다면 아마 지금도 끊지 못했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학원을 다니지 않았고, 밤늦게까지 쏘다니다가 집에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 어떠한 것도 두렵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학교 폭력을 일삼지는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반에서 언제나 제일 작은 아이였고, 무서움을 풍기기보다는 장난기가 많아 반에서 심하게 까부는 아이였다. 물론 형법상 술을 마시거나 오토바이를 탔던 것은 범죄임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나는 영재가 될 수 있었던 학생과 비행청소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잘 넘나들었다.
오랜 시간 소년법정을 담당한 천종호 부장판사가 재판한 소년범 1,872명 중에 절반 정도인 897명(47.9%)은 이혼, 사별, 가출 등으로 인한 한부모 혹은 조손 가정이었다. 다른 판사나 법원 소년재판도 이러한 경우가 많다. 열악한 가정환경이나 가난 등의 조건이 청소년 비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부모의 일탈이나 가난 등의 상황이나 환경으로 인해서도 비행청소년이 될 수 있다.
간혹 '어머니가 나를 떠나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영재가 되었을까?'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가정하는 것이 의미 없음을 잘 안다. 하지만 함께 살았던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길어진 현재에 추측해 보자면, 아마 나는 영재가 되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하지 않아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면, 온전히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하게도 청소년기의 방황 따위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혼을 했고, 나는 잠깐동안 방황을 했다. 아버지의 '올바름'을 기반으로 하는 양육 아래 나는 매 순간을 가난에만 천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영재가 될 만큼 뛰어나서 비행청소년으로 계속 살지 않았던 것이 아다. 나에게는 그저 아버지의 '포기하지 않음'이라는 행운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부모 가정에서 경험했을 부정적인 심리와 절대적으로 양육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의 부족, 경제적 가난으로 인한 방황이었다. 그래서인지 가난은 비행청소년이 되는 원인 중 하나라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가난은 다른 조건과 연합할 수 있고,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다. 영재의 가능성이 비행청소년의 가능성으로 바뀌는 것은 마법이 아니다. 몇 가지 조건이나 상황이 바뀐다면 누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