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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May 03. 2024

나는 개근거지였다.

처음 '개근거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받음은 둘째였고,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어렸을 때의 나는 좁은 의미로도, 넓은 의미로도 개근거지가 확실했다. 개근거지는 '교외 체험학습으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는 형편 어려운 아이'를 속되게 부르는 신조어다. 물론 내가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개근이 학생의 성실함을 알아볼 수 있는 기준이라던가 하는 뻔한 것이 아니다.


먼저 좁은 의미로 개근거지를 해석해 보면, 나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해외는 고사하고 국내에도 가족 여행을 가본 기억이 없다. 여행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내가 기억하는 여행은 학교에서 단체로 갔던 수학여행이 전부다.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는 것 정도로 여행의 의미를 확대하면, 친척 집에서 자고 오는 것도 포함할 수 있다. 그 마저도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 외가라는 단서가 붙어야만 어렴풋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부모님 이혼 후에도 관계하고 지냈던 친가 쪽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아서 그런지 자고 온 적은 없다. 낮잠정도라면 모를까.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집에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가는 정도의 가난은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 가족 여행은 없었다. 당연하다는 말이 여기에서 적합한지 모르겠지만, 가족사진이라고 할 것도 없다. 보통은 여행 가서 사진을 찍으니까 말이다. 스마트 폰은 성인이 되고서야 생겼으니, 사진은 언제 어디서나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과는 시대적 배경이 달랐다. 중학교에 갈 때쯤, 주 5일제가 시범 도입됐다. 공공기관이 우선 도입했으니, 목수인 아버지는 주 6일제의 시대를 더 오래 살았다.

ⓒ Charlotte Noelle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남자아이 둘을 오롯이 혼자 양육해야 하는 아버지에게, 주 6일 노동 후 맞이하는 일요일은 밀린 집안일을 하기에도 모자랐다. 지금의 나에게 물어본다면, 당시 가족 여행은 이리저리 봐도 사치에 가까웠던 듯하다. 가족 여행을 가본 적 없으니, 내 삶에 다른 여행은 당연하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 가족 첫 여행도 나와 동생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야, 비로소 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여행 가면 돈은 누가 주노? 쉬면 아무도 돈 안 준다."라며 끝내 안 가겠다고 했지만, 내가 저가항공사 비행기를, 동생이 에어비앤비 숙소를 결제했다. 내가 비행기까지 예매하자 아버지는 못 이기는 척 여행을 승낙했다. 아무래도 처음 가는 가족 여행이라서 무리를 했다. 일본 오사카에 갔는데, 술을 잘 못 마시는 우리 삼 부자는 숙소에서 호로요이(과일 맥주)를 마셨다. 그 맛을 여전히 잊지 못하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가족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그 흔한 가족 여행조차 가보지 못한 개근거지였다.


넓은 의미로 개근거지를 해석해 봐도, 나는 개근거지가 확실했다. 반대로 말하면 나는 개근하지 않으면 안 됐다. 개근하지 않으면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행이 아니라, 몸이 아파도 학교에 가야만 했다. 물론 자주 아픈 것은 아니지만, 아프면 양호실에라도 가서 버텼다. '병원이라도 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조퇴해서 병원에 가면 아무도 없는 집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는 것이 꺼려진다. 끙끙 앓으면서도 그저 버티는 나를 주위에서 보고 미련하다며 혀를 찰 정도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약을 먹으면 2~3일 정도 후에는 괜찮아질 것을 알아도, 나는 '감기 따위'라며 버티는 것이 더 편하다. 연말정산 할 때면, 의료비 지출 항목에 0원이라고 찍혀있는 것을 매년 볼 정도다. 내 '경계밖 가난'의 스노볼은 계속 커지는 중인 셈이다.

ⓒ Tingey Injury Law Firm of Unsplah. All right reserved.

아동이 집에 혼자 있는 것은 학대나 방치, 방임으로 볼 수 있지만, 우리 집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법이 우리 집의 형태를 가난의 분류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부모님이 이혼하던 내가 열 살 때, 그러니까 2000년에는 '모자복지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남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존재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물론 2003년 하반기에 '모·부자복지법'으로 개정되지만, 으레 그렇듯 우리 가족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와 옛 법을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개정된 법의 연혁을 살펴보면서, 당시에 만약 알았다고 하더라도 지원받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 시설 입소를 전제 조건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시설에서 자라는 것이 더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나는 방관자의 아들로서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개근거지여야 했다.


내 삶에는 '여행'이, 국가에게는 '남자가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개근거지로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성실함과 같은 가치를 강요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개근거지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다른 상황이 성실함의 우선순위 보다 높았을 뿐이다. 개근거지를 이야기하며 '시대 변화를 함께 겪었지.'라고 푸념하기에 앞서,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미묘한 차이를 나의 경계밖 가난은 눈치채도록 부추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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