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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나만의 퇴사 기준이 있다.

by 김재용

나는 직장을 계속 다니는 것에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이 자리에서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색을 내지 못한다면, 지역의 변화보다 현상 유지에 머무른다면. 나의 개인적 안위와 관계없이 그만두겠다고 말이다. 매일 세 가지를 점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이 기준을 점검하며 나의 나태를 관리하려 했다. 기준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어려울 때면 주변에 물어보기도 했다.


2021년 1월 1일. 나는 지금 직장에 입사를 했다. 이곳은 법적 조직으로서 오래전부터 구성되어 있지만, 사무국 설치는 내 입사 일자와 같다. 입사했을 때 담당 공무원에게 내가 전달받은 것은 고작 통장 두 개와 고유번호증이 전부였다. 하지만 크게 당황스럽지 않았다. 아무런 체계가 없음을 알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전 직장에서 홍보 업무 담당했던 경험을 살려 브랜딩부터 시작했다.


조직의 비전과 미션으로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잡고, 로고와 홈페이지를 만들며 브랜딩을 하고, 관행적으로 진행하던 것을 전부 없애고 하나하나 새로이 만들어 갔다. 시행착오가 없던 것은 아니다. 공공기관과 밀접하게 맞닿아 업무를 보는 곳이다 보니 관행을 강요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문화에 다른 곳에서는 거들떠보지 않을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다 숱한 거절에 스트레스로 구내염을 1년 내도록 앓기도 하고, 권한의 부재에 따라 옳지 않음을 알아도 따라야만 하는 상황에서 무기력함도 느꼈다.


체계만 없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마음껏 토로할 수 있는 곳도 없다. 사무국에는 나만 상근직이다. 나와 같은 고민을 깊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 역시나 없다. 좌절 끝에 비상근 관리자에게 퇴사 고민을 할 때가 있다. "혼자 힘든 것 잘 알지. 얼른 새로운 사람 뽑아야 할 텐데."와 같은 공감이나 "지금까지 해온 것이 아깝잖아. 이 단계를 버티면 본인도, 지역도 한 단계 성장할 거야."와 같은 희망, "팀장님, 너무 잘하고 있어요. 나였으면 팀장님처럼 못했을 것 같아."와 같은 격려의 말로 퇴사의 고민을 번번이 접었다.


지역에서 나의 노력에 의해 변화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작년에 우리가 노력하고 있는 '무장애 지도 만들기' 프로젝트로 서울 강남에서 관련 포럼에 사례 발표도 하고 왔다. 관행이나 허례허식을 제외한, 모두가 반대하던 공유회도 참여자들의 입에서 앞으로 매년 하자는 후기와 함께 마쳤다. 수직적인 공공 기관과 지역의 사회보장 시설과의 관계를 보다 수평적인 구조로 논의하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조직이 성장하면 할수록, 이 조직에 관심을 갖는 사람 또한 많아졌다. 이전에는 무관심했기에 나에게 자율로 부여되었던 영역이,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다시금 관행이라는 구속으로 이어졌다. 보다 덜 경직된 업무 방식으로 주목받았지만, 주목을 받으며 더 경직되도록 요구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러나 내가 속한 조직은 이를 적절히 조율하며 업무를 지속할 수 있어야 함을 안다.


나는 사실 입사할 때부터 이 조직에서 나의 결말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전 직장에서부터 공공 기관과 소통하며 느끼는 답답함에 염증을 가지곤 했다. 이를 테면 행사 현수막을 만드는 사소한 것에서 갈등이 생긴다. 나는 현수막에 우리가 무엇을 노력하는지 써야만 입증되는 것이라면, 잘못 기획된 사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공공 기관의 입장은 사진으로서 기록이 우선한다. 나는 몇 분 동안 찍는 사진을 위해, 몇 백 년이 걸려 분해될지 모르는 현수막을 만들고 싶지 않다.


과도한 의전과 허례허식, 관행 등으로 행정력을 담보하는 업무 방식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잘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냉철하게 평가하면 내가 조직을 위해 잘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인 듯하다. 이 조직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지역에 전혀 없던 협업하는 체계를 만들고, 보다 부드러운 소통의 문화를 만들었다. 다만 앞으로 조직이 성장하려면 내가 가진 것과는 다른 역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간 문화의 이해를 바탕으로 조율하고, 조금은 더디 가더라도 확실하게 한 발자국을 내딛고야 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나만의 퇴사 기준을 가지고 있듯이, 나는 이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종종 갈등을 만든다. 누군가는 나에게도 성장의 기회가 된다거나, 기준을 조금 융통성 있게 적용하면 된다거나, 수십 년 동안 쌓아온 큰 조직의 관행을 깨부수기 어렵다고 말한다. 다만 이것이 내가 선택한 사회복지사로서의 소명이고, 불가능한 일이었을지언정 타협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신념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선언이다. 나는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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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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