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저는 일이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말을 자신 있게 내뱉기가 어렵다. 업무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 다니는 직장에서 4년 반동안 똑같은 업무를 했다. 오히려 일은 손에 익어서 빨라졌고, 사람과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기에 한층 수월해졌고, 4년이라는 시간만큼 급여도 올라갔다. 그러나 재밌어서 하는 일에 재미가 사라졌다.
악순환에 빠졌다. 일이 재미없으니 예전만큼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의욕이 없으니 해야 하는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집중을 못하니 일에서 성과를 만들기 힘들다. 성과가 줄어들며 성취감을 얻지 못하니 일이 재미가 없다. 성취감은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에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사회복지사로서 내가 느끼는 성취감은 지역사회 변화와 연결되기에 개인의 만족보다 항상 무겁게 여겼다.
처음에는 대부분 현대인이 그렇듯, 단순하게 집중하지 못해서 성과를 만들지 못한다고 여겼다. 일에 집중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카페에서 나올법한 로파이(Lo-Fi) 연주 음악이나 클래식 음악을 일할 때 듣기 시작했다. 평소에 즐겨 듣는 음악 취향과는 반대지만 심신 안정을 돕고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해서 듣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다. 뽀모도로 타이머도 샀다. 15분, 30분, 60분 등 자신이 원하는 만큼 시간을 설정해서 그 시간 동안 집중하도록 돕는 훈련 도구다. 이것은 모래시계 작동원리와 같은데, 설정한 시간이 끝나면 진동이 울린다. 혼자 일하는 근무 형태라서 다른 유혹에 빠지기 쉽다. 스스로를 통제하며 고도의 집중을 유지해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함으로써 성취감을 높이려 애썼다.
해야 할 일 목록(To do list)을 만들어서 하나씩 소거하며 작은 성취감이라도 쌓아가려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집중력은 높아졌다. 그러나 집중력만 높아졌다. 다른 사람은 내게 충분히 잘하고 있다며 치켜세우지만, 내가 만족할 만큼의 성과는 소원하기만 하다. 사실 누구도 나에게 퇴사를 권하는 사람은 없다. 이러한 현재에 만족하면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조직의 입장에서도, 내 개인의 경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와 조직을 속이는 행위다. 이것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익숙해진 업무로 편안함과 안정적 생계, 타인의 칭찬을 잃기 두려웠던 듯하다. 회사를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면서도 두려움에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나날은 낭만적 우울이 되어 마음을 짓눌렀다.
우울을 낭만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마음의 짐을 한가득 어깨에 짊어진 형태의 우울이다. 이러한 우울은 스스로를 계속 의심하도록 한다. 무언가를 해내는 존재가 아닌 자신은 쓸모가 없다고 여긴다. 매일 하루 중 3분의 1씩을 배우는 것 없이 허비한다. 나는 반복되는 우울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퇴사할 결심을 해야만 했다.
한때 우리 사회에서 '조용한 퇴사'가 화두였던 적 있다.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지는 않지만 ‘자신이 맡은 최소한 업무만 처리하는 행위’를 뜻하는 신조어다. 나는 조용한 퇴사와 어울리지 않는다. 나에게 일이나 직장은 단순히 돈을 버는 행위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일이란 스스로 성장을 추구하고, 지역사회 변화를 노력하며 일에서 재미와 성취를 느끼고, 일과 삶이 분리되지 않도록 애쓰며 삶의 지향을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조용한 퇴사와 같은 상황에서 낭만적 우울을 느끼며 시끄러운 퇴사를 결심했다. 다시 "저는 일이 재밌어서 하는 거예요."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 시끄러운 퇴사를 하기로 했다. 이것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다만 시끄러운 퇴사로 '다시 나답게 일하고 싶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나는 조용한 퇴사를 지속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발버둥 칠 것이고,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방임의 반복은 시끄러운 퇴사로 벗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