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임감은 중히 여기는 마음가짐 중 하나다. 일주일에 삼일은 놀러 다니며 집에 자주 들어가지 않던 내가, 강아지와 단 둘이 살게 되며 한 달에 한 번조차 약속을 잡지 않는 달이 더 많아졌다. 내가 함께 살기로 결정하고 데려온 만큼 끝까지 건강하게 살아가려는 책임감의 표현이다.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나갔던 해외여행조차도 수년을 나가지 않았다. 강아지 호텔에서는 산책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느끼는 행복보다, 강아지를 통해 느끼는 책임감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토록 책임감이 강한 내가 '퇴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했다. 처음은 농담이었다. 직장인이라면 퇴사를 농담으로 쓰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저는 이미 써놨죠. 날짜만 써서 관리자께 제출만 하면 됩니다." 퇴사 마음을 비율로 따지면, 퇴사하고 싶은 마음이 1이고 농담이 9였다. 내가 일하는 조직이 지향하는 지점과 업무 진행의 자율성 부여 등의 여건, 지역사회를 조금씩 바꿔가고 있다는 효능감 등이 여기서 일을 지속하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퇴사하고 싶은 1의 마음은 5가 되고, 9가 됐다. 마음이 바뀐 것을 전혀 몰랐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 일테다. 서른다섯 살이라는 나이와 어느덧 십 년에 가까운 경력, 상향 이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 청년이 떠나가기 바쁜 부산이라는 지역에서 재밌는 프로젝트의 부재 등 요인이 퇴사를 망설이게 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이는 것은 내 마음 건강에도 좋지 않았다.
나는 일이 재밌어서 하는 거라며 늘 자부심 넘치게 말했다. 월요일이 두려운 적도 없었다. 휴일에 운동이나 미드 몰아보기 같은 쉼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월요일 아침에는 이번 주의 일을 계획하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휴일과 월요일은 다른 종류의 즐거움일 뿐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이미 수요일 저녁이라 이틀만 출근하면 되는데, 목요일 출근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매일을 병든 채 보낸 듯하다. 월요병은 물론이고, 목요병, 금요병도 생겼다. 금요일에는 벌써 다음 주에 해야 할 일을 두려워했다. 그럴수록 퇴근 후의 삶에 몰두했다. 글 연재를 이어가고, 다른 플랫폼에도 콘텐츠를 만들어서 업로드하고, 경제적 자유를 위해 밤이면 미국 주식 투자 공부를 했다. 문제는 몰두한 만큼 성과가 나오면서 퇴근 후의 삶이 귀해졌다.
퇴근 후의 삶이 귀해질수록 아이러니하게도 퇴사는 선택할 수 없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으면서 퇴근 후의 삶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지만 손에 익어 익숙한 일을 견디고, 지역사회를 혁신적으로 바꾸기보다 현상 유지에 가깝게 운영되는 정체기를 무던히 여기면 된다. 현재를 괜찮다고 되뇌며 스스로를 속이면 이 삶을 지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겠다며 퇴사를 결심했다. 현재를 지속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가 중히 여기는 책임감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이다. 조직에게도, 나에게도 현재의 지속은 손실일 뿐이다. 나는 퇴사에 대한 마음과 이직에 대한 두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지역을 떠나서 기회가 많은 서울로 향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모두가 서울을 향할 때 지역에서 그들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열어두고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되찾기로 했다.
책임감은 그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현재를 적극적으로 버리면서까지 쟁취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직접 느끼는 행복보다 강아지와 건강하게 사는 삶으로 책임감을 추구했듯, 내 온 마음을 쏟아부어 일에서 효능감을 느끼며 내 삶에서도 책임감을 추구하려 한다. 책임감으로 퇴사한다는 말은 모순이 아니다. 지금의 나는 그 책임을 살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