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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Dec 08. 2022

영화 《올빼미》에서 올빼미는 착해야만 하는가

영화 《올빼미》는 밤에만 앞이 보이는 맹인 침술사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후,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벌이는 하룻밤 사투를 그린 역사 미스터리 스릴러다. 인조실록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로 기록된 역사적 미스터리에서 출발하여 낮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밤에만 희미하게 볼 수 있는 '맹인 침술사', 즉 올빼미로 설정하여 역사적 개연성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만든 작품이라고 안태진 감독은 설명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


'천경수'는 주맹증으로 밝은 환경이나 물체를 보지 못해 '천봉사'로 불린다. 다시 말해 '천 씨 성을 가진 맹인'이다. 밤이 되면 명확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희미하게 보이지만 주변인들은 이를 알지 못한다. '천경수'는 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숨기는데, 그 이유는 '맹인'이 때에 따라 앞을 본다고 하면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천경수'는 주맹증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관직에 오르기 위해 주맹증을 이용하기도 한다. 이렇게 상반된 연출에서 천경수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거나(예를 들면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서 약재 창고에서 성관계를 지속하는 등) 이용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넘어가는 장면(예를 들면 푸줏간에서 고기를 적게 주는 등)에서는 전혀 이상하거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반면 주맹증을 이용하여 본인이 이득을 취하거나(예를 들면 맹인임을 이용하여 궁에 입궐하는 등), 꼭 자신의 이익이 아니더라도 주맹증을 이용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드는 장면에서는(예를 들면 선배가 텃세를 부리지만 간단히 해결하는 등) 이상함과 불편함을 느꼈다. 이상함과 불편함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밤에만 눈을 뜨는 올빼미와 천경수 ⓒ 2022. (주) NEW. All right reserved.

답은 간단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은 착해야만 한다는 편견, 약자가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반대로 스스로의 약함을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면 안 된다는 착각, 약자나 장애인이 위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 반대를 가정한다면 앞의 사례들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강자는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오히려 본인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벌을 가하지 않고 넘어감으로써 강자는 관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약자를 더 약하게 만들고, 강자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했을 것이다.


때론 눈 감고 사는 것이 몸에 더 좋을 때가 있습니다.


'천경수‘는 '소현세자(배우 김성철)'에게 이와 같이 조언한다. 때론 못 본 척, 못 들은 척해야 한다는 것은 꽤 지혜로운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천경수'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뼈 아픈 조언이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삶의 중심에 본인보다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이 많을 확률이 높다. 본인이 가진 장애로 인해 사람들의 연민, 불편, 편견, 차별 등의 부정적 감정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평생을 타인의 시선에 맞춰 배려해서 말하고 행동한다. 이것이 우리가 당연하다고 느껴왔던 '착한 장애인', 즉 '착해야만 하는 장애인'이다. 나 또한 이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영화 올빼미 포스터 ⓒ 2022. (주) NEW. All right reserved.

장애를 가졌다면 늘 착해야 하는가? 장애를 가졌을 뿐 사람이라는 것은 다름이 없다. 착하거나 못된 행동들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장애를 가졌다 하여 착함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다. 장애와 착함은 연결성이 없다. 장애인도 못된 사람이길 선택할 수 있다.


'착하다'라는 단어는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로 정의된다. 오히려 착해야 하는 것은 이제껏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배려하며 살아왔던 장애를 가진 사람이기보다, 장애의 특성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편견과 착각과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왔던 비장애인이 선택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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