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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용 Dec 28. 2022

‘내로남불 젊은 꼰대‘가 그대와 함께 사랑을

나는 소위 말하는 '젊은 꼰대'이지만, 사랑을 시작하면 '꼰대'의 특성에다가 '내로남불'의 기질까지 더해지는 듯하다. 상대가 내 생각처럼 행동했으면 하는 마음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상대가 내 생각에서 크게 다른 행동을 하면, 상대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다투기도 했고, 상대를 특정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수정하려 했다. 그렇게 쌓인 감정들로 인해 결국 서로가 다른 사람임을 인정하고 헤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같은 사람이 어디 있어?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다양성 아래에서 사회는 발전하는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항상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태어난 환경, 가족 문화, 살아온 방식, 앞으로 그리는 미래가 나와 같은 사람이 있기나 할까? 사랑도, 사람도, 삶도 다양성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상대가 나와 다른 생각 또는 행동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단지 내가 이기적인 존재라고 끝맺음하는 것은 오히려 내 치부를 직면하지 않는 듯한 자괴감이 들었다. 이제 그 치부를 직면할 차례다.


어느 누구도 과거가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현재 사랑하는 사람은 과거의 많은 순간들에 의해 겹겹이 쌓인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게 된 시점에서도 내 생각과 다른 모습은 상대에게 존재했을 것이다. 다만 사랑이란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통제 불가능한 직진의 감정이 중첩되어 나와는 다름을 보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나와는 다르면서도 견고하게 쌓인 상대를 사랑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내가 상대를 바꾸려고만 한다면, 상대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다. 과거에 애써 내가 보지 않았던 상대의 다름을, 현재에 나는 애써 도망가려 하는 비겁한 과정일 뿐이다. 나는 어떻게 해서도 상대의 과거를 바꿀 수 없고, 이미 쌓인 상대를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직면해야 하는 것은 상대의 다름이 아니라, 내 비겁함에서 비롯된 옹졸함이다.

© 2022. Unsplash. All right reserved.

내가 상대를 바꾸려 하는 것과 반대로, 상대가 나를 바꾸려 하는 것에는 순응하지 않는다. 전형적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아예 바뀌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상대와 헤어지고서야 깨달음에, 아쉬움에, 그리움에 바뀌었다. 왜 상대가 내게 권유했을 때는 바뀌지 못했을까? 아마 옳고, 그름에 대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당시에는 내가 옳고 상대가 그르다고 생각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미루어보건대 금방 사라질 자존심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내가 억지 부렸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억지로 직면하지 않았던 창피함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억지를 부려서라도 지켜냈던 자존심은 깨진 유리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내가 그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널브러진 자존심을 땅바닥에 방치해 두면, 조각난 파편이 오히려 내 심장을 더 날카롭게 조각낸다.


아직 줍지 못한 파편들이 있고, 이미 주워 담아서 더 이상 나를 상처 내지 않는 조각들이 있다. 언제쯤이면 모든 조각들을 주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널브러진 조각을 줍는 방법은 왠지 알 것만 같다. 경험으로 유추해보자면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야 하는 듯하다. 내 감정과 이기심에 솔직하게 되면, 상대가 나를 위해 해주는 진심 어린 충고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나아가 나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상대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내로남불 젊은 꼰대'도 사랑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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