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지

나와 회사의 관계

by avg eighty seven


네, 이제 다 되셨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담당자가 인사를 건냈다. 정말 다 끝난건가. 뭔가 다 끝내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이대로 나가면 되는건가. 뭔가 아직 완료가 안 돼 목덜미를 한번 더 붙잡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지막 배웅을 하러 동료가 함께 건물 앞까지 나와줬다. 뭔가 하나 남겨야 할 것만 같은 기념 사진을 몇 장 남겼다. 버스를 타려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어쩐지 전화벨이 울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기는 찼지만 날은 맑았고, 햇살이 버스 안에 드리웠다. 버스 안 공기는 바짝 마른 느낌이지만 그 덕에 더 간결하게 따뜻했고 가슴께까지 비추는 초겨울 햇살에 이내 몸이 나른해졌다. 늘 막히던 사거리 구간을 그 날은 유난히도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아이디에 권한이 없습니다

이튿날 회사와의 연계 사이트 내 모든 접속 권한이 사라졌다. 옮기게 될 회사의 요청으로 퇴사 후의 경력증명서가 필요했는데, 이 또한 퇴사한 다음날부터 바로 출력이 가능했다. 시스템 상에서 내가 온전한 퇴사자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마치 무언가 보이지 않는 강한 유대가 있을 것만 같았던 회사와 나와의 관계는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숫자처럼 그렇게 직원과 퇴사원으로 칼같이 구분되었다. 10년도 안 되는 회사와의 관계 정리에서 오는 허망함이 이 정도인데, 평생 직장을 삼았던 선배 세대들이 정년 당시에 겪었을 허망함을 상상하자니 막연한 동정심이 들었다. 아빠의 마지막날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해 본 첫 날이었다.



퇴사를 경험하며 자본주의 세계에서 나와 회사라는 존재의 관계를 실감했다. 전 회사는 여러 모로 내게 감사하고 좋은 회사였지만, 그와 별개로 '계약'된 관계를 인지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과 아닌 것에서 나타날 미래의 온도차가 어떠할지 조금 더 어린 이 시점에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이직의 성공과 별개로 얻을 수 있었던 큰 소득이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첫 직장생활을 통해 체감한 값진 경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새 직장에 천천히 적응해 나가는 중이다. 또 한 번 성장할 모습에 가슴이 벅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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