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은도 Feb 27. 2022

종아리 남자

그의 뒤를 따르리

 난 그를 종아리남이라고 불렀다. 


그를 처음 본건 집 바로 뒷산에 있는 공원에서 였는데 당시 이혼하고 어느정도 지난 후였고, 난 음악을 들으며 그 공원을 몇 바퀴씩 도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재택 근무였기에 볕이 짱짱한 낮에 광합성을 하는 마음으로 뒷산을 올랐다. 야트막한 산 꼭대기 위 작은 공원, 작은 트랙. 트랙을 따라 동네주민들이 시계바늘 마냥 천천히 돌아갔고 나도 그 대열에 꽤나 섞여 들었다 생각 될 즈음이었다. 


천천히 도는 시계 바늘들 사이를 마치 초침처럼 내달리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검은 티셔츠에 검은 반바지, 빨간 운동화의 그 사람은 마스크를 밀착하다 못해 아예 뒤에서 꽉 묶고는, 그러고도 숨 막히 지도 않은지 빠른 속도록 나를 지나쳐 뛰어갔다. 그의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고 티셔츠도 축축히 그의 몸통을 휘감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 낮 시간, 주로 연령대 지긋하신 분들이 주를 이루는 공원에서 그는 꽤나 인상적인 사람으로 각인됐다. 처음엔 그저 누군지 몰라도 잘 뛰네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갔을 때도, 또 다음에 갔을 때도, 그는 비슷한 시간대에 그곳을 달렸다. 

당시의 나는 런닝 문화 같은 것을 잘 몰라서 사람들이 취미로 달리기를 하고 한시간씩 내리 달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몰랐던 때였다. 그런 때에 그 사람을 본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약간의 충격, 일종의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것이다. 내가 트랙을 설렁설렁 몇 바퀴 돌고 몇가지 기구로 운동을 하는 그 시간 내내 그는 일관된 빠른 속도로 트랙을 돌았다. 

절대 속도가 느려 지지도 멈추지도 않고 거의 한시간 정도를 그렇게. 그런 사람은 프로 운동 선수에서나 있는 줄 알았다. 동네에 있는 사람이 그런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하고 경이롭고.


그래서 나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 사람을 보면 달리고 싶어져서.

처음엔 잠깐 달리다 멈춰 서서 숨을 몰아 쉬곤 했다. 한 바퀴 달리는 것도 숨이 차는 정도여서 당시 내 이어폰에 나오는 노래 한 곡이 끝날 때 까지만 뛰어보자 라는 생각으로 달렸다.

그렇게 한 곡 채워 달리기를 한동안 계속 했다. 고작 3분, 4분이었지만 그만큼 뛸 수 있다는 것도 학창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신기한 일. 반에서 오래 달리기 시합을 하면 꼭 꼴지 아니면 꼴찌에서 두번째였다. 한번은 오래달리기를 다 하고 나서 헛구역질을 하며 눈물이 절로 터져 나왔던 일도 있었다. 몇 분씩 달린 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럽고 나로선 불가능의 영역이란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헬스를 배우고 나서 신체 활동에 자신감이 생겼던 건지, 내가 못할 거란 지레짐작을 버리고 꾸준히 달리기 도전을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한 곡이 두 곡, 두 곡이 세곡, 점점 한번에 달릴 수 있는 곡 수가 늘어났다. 물론 달리기 플레이리스트는 ROCKY OST. 영화 속에서 록키가 해변이나 눈 덮인 산, 동네를 달리던 모습을 머리로 플레이 하며 내 자신이 록키가 된 마냥, 소련권투선수와의 시합을 앞두고 있는 것 마냥 달렸다. 그래봤자 엄청 느린 속도의 러닝이었지만 내게는 이게 최고속도라고. 난 지금 엄청 빠른 거라고. 슉슉.


일주일에 꼬박 세 번씩은 나가서 뛰었다. 한참 재미 붙었을때는 3일 연속 나가서 뛰기도 했다. 달린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것인지, 달리고 난 뒤의 개운함과 몸이 가볍고 이완되는 느낌. 모든 것이 너무 중독 적이었다. 마성의 달리기. 그렇게 6개월 정도 되었을까. 난 어느새 한번에 25분 정도를 뛸 수 있었다. 물론 엄청 낮은 수준의 달리기란 건 안다. 25분은 러닝 크루같은 곳에 가입하기도 쪽팔린 수준인 것 같아 알아보다가 접었다. 그렇지만 난 행복했다. 헬스와 함께 달리기가 내 인생의 큰 일부가 되었다. 


내가 뛰는 시간은 점심이 얼추 소화 되가는 시간, 볕도 좋은 시간. 그래서 종아리남과 그렇게 동선이 겹쳤었나보다. 달리기를 좋아하게 되다 보니 절로 그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약간 흠모? 하는 기분이 들었다. 운동선수를 동경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고민했지만 결국 한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약간 짧은 런닝쇼츠를 입고 잔 근육을 물결치며 달리는 그의 다리는 내가 살면서 본 다리 중에 가장 아름다웠다. 게다가 그의 종아리는 마치 끌로 깎아내린 듯 조각 같은 모양새를 뽐냈다. 나를 앞서 달려나갈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다리를 보다가 화들짝 놀라기를 몇 번, 나중에는 아주 일부러, 대놓고, 몰래 봤다. 아… 정말 너무 미안하고 변태 같지만, 솔직히 말한다. 너무 부끄럽지만 진심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건 아무래도 나의 본능적 시선인 것 같다고 변명해 본다. 


길거리에서 여자 다리를 훔쳐보는 남자들을 꼴불견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내가 그러고 있었다. 

난 그 이후로 어디 나사가 풀려버린 건지 반바지를 입은 남자 마다 종아리를 확인하며 머릿속 종아리남의 그것과 비교하는 버릇이 생겼다. 난 그저 인간, 인간이기 이전에 그저 동물.

오늘 런닝할때도 아름다운 종아리남의 다리를 볼 수 있을지 기대하는 한 마리 동물과도 같았다. 

훔쳐봐서 미안해요. 종아리남. 그리고 고마워요. 인간이 그렇게도 달릴 수 있다는 걸 알려줘서. 당신에게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달리기 애정가가 되어서 난 한동안 달리기의 이점을 주변에 홍보하고 다녔다. 거의 10개월 정도를 달렸던가? 그러다 너무 무리했는지 발목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이었다. 내 연골이 선천적으로 얇다고 했다. 그때 한의원도 다녔었는데 한의원에서 달리지 못하는 내 처지를 비관하며 눈물을 훔치며 침을 맞았던 적도 있었다. 약한 관절을 가진 내가 슬펐다. 게다가 지금은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려 인대가 파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 몇 개월은 지나야 다시 조금씩 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달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조금씩이라도 달리고 싶다. 이젠 건강하기 위해 운동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운동하고 싶어서 건강하자라는 식. 


난 언젠가 또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하면 올해 늦봄쯤.

그를 다시 마주치길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사병 자가치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