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진 Oct 03. 2016

독일 하이델베르그

마트에서 생긴 일


남자들은 몰라

여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피곤함을. . .


매일 꽉 끼는 속옷기본이고

꼬챙이에 의존한 하이힐을 신고

다리길이를 늘여야 하지

더 예쁜 여자 흉내를 내려면

머리부터 다리까지 선 하나 털 하나 열심히 관리하고

매일 열 종류의 화장품을 모공 속까지 채웠다

깨끗이 게워냈다를 반복해야 해



하지만 나한테 진짜 괴로운 건 5일 중 하루는 피를 흘려야 한다는 거야.



여행을 위해 짐을 싸다 보니

내가 여자가 아니었으면 필요 없을 물건들이 한가득이잖아


한참을 고민한 끝에

치장을 위한 도구를 살려두는 대신

비상사태를 위해 준비했던 도구들을 빼놓기로 했어

편한 복장이 최고라고 자부하며 다녀온 여행 뒤에는

애정 하는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경험이 수차례있었으니까


오늘은 비 오는 하이델베르크를 들렀어

대학도시이니만큼

비가 추적추적 오는 굳은 날씨 속에서도

젊은 생기와 기풍을 잃지 않네


유부녀를 사랑했던 괴테의 상처가 책으로 남겨졌던

철학자의 거리를 지나

종교적 이념을 빙자한 오랜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하이델베르크 성에 올랐지


프랑스 국경에 인접해 전쟁의 피해가 많았던 고성은

내부를 처참하게 드러낸 채

상처 위에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어


몇 세기에 걸쳐 명문 귀족의 터전으로 굳건했던 이곳이

힘없이 무너진 채 나이 들어가고 있다니. . .

사람들로 하여금 아픔을 기억하고

평화를 사랑하라고

또한 모든 것이 덧없음을 잊지 말라고



아휴~ 이 딱한 것.

수백 년 동안 상처를 그대로 드러낸 채

자리를 지키느라 쓰라렸을 성벽의 몸을

살며시 어루만져 보았어.



그때,

건물 내부에서 뜨거운 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시간차를 두고 나에게서도 뭔가 움찔한 게 느껴졌어

헐~~ 이 건물이 음기를 불어넣었나

갑자기 예정에 없던 마법에 걸린 거야

정확성을 자랑하던 제 생체리듬 시계가 어찌 된 거지

아놔. . . 다 빼고 두 개밖에 안 가져왔는데



마트에서 아무리 찾아도 마법을 위한 도구를 찾을 수 없어서 영어로 물었는데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는 거야

점원 언니는 마트 안의 손님들에게 큰소리로 뭐라 뭐라 했어

알고 보니 그건 손님 중 영어가 가능한 사람을 찾는 거였고

무슨 일인지 궁금한 사람 네댓 명과 영어를 아주 쪼금 아는 사람 서너 명이 나를 둘렀어


젊은 사람들은 죄다 대학에 있는지

나이 지긋하신 이모님들 뿐이었지

같은 라틴문자를 쓰는 독일 사람들이 영어를 잘할 것 같잖아?

아니. . . 우리 때 사교육 없이 영어를 배운 고등학생 정도야.

그것도 입시를 위해 절실히 배운 우리와는 달라.

'왜 우리가 힘들여 다른 나라 언어를 배워야 하지?

우린 세계 4위 경제대국이고 피파랭킹 2위야.

너희들이 우리말을 배워야 할걸?

라고 생각하나 봐



아랫도리로 뭔가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민망한 보디랭귀지도 통하지 않아 애가 타는데

그 상황에서도 사람들끼리 토론을 하며

내 의중을 깨달아 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우스웠어

행인 1 트레저? 클로드?(바지? 옷 말이야?)

나 노, 잇츠 낫 클로드(아니, 옷은 아네요)

블러드 블러드!(아래쪽을 가리키며-지금 여기서 피가 나요!)

잇츠 어. . . . 다이애퍼 폴 우먼.

(이건. . . 말하자면 여자가 쓰는 기저귀예요)

행인 2 언더웨어? (속옷 말이야?)

나 노.. 잇츠 디써포저블. . .

(아니요 이건 일회용이에요)

위 유스 잇 듀어링 멘스 트레이션 페리 어드

(있잖아요. 그 기간에 쓰는 거. . .)

행인 3 롸잇 프리즈 (써봐 아무래도 네 발음이 구려서 못 알아듣는 거 같아)

나 음. . .이즈 베럴 투 드로와 픽쳘

(스펠링에 자신 없으니 그리는 게 낫겠어요.)



결국 누군가가 내민 영수증에다

길쭉한 프렌치 파이 옆에

앙증맞은 날개를 단 그림을 그렸어.

그제야 알아들은 독일 여성들은

아하!

박장대소를 하며 나를 감싸 안았지

아. .  먼 이국에서 느껴지는 언니들의 공감대라니.

일이 해결될 때까지 아무도 떠나지 않고

내 옆에 있다 여행을 응원하며 헤어졌다니까


점원 언니는 미로처럼 생긴 통로 지나 수 십 가지 생리대가 전시되어 있는 곳을 데려다주었어.



이게 다 데이터로밍을 해가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

독일어로 생리대를 치면 damenbinde!

바로 나오잖아.

해외로 갈 때에는

자신이 스마트하지 않으면

스마트폰이라도 꼭 쓸 수 있게 해서 가자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일이었어.




매거진의 이전글 유럽을 걷다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