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 가기로 한 어느 날, 아이 간식으로 뽀로로 과자 한 갑을 챙겼다. 보이지 않게 가방에 넣는다고 넣었는데, 어느새 발견했는지 당장 먹는다고 난리다. 나는 준비물을 챙기고 있었기에 아이를 돌보던 남편이 말했다.
“딱 한 개만 먹는 거야.”
“응!”
대답은 잘했지만 27개월 아이와의 약속이 잘 지켜질 리 없다. 한 개 먹더니 더 먹는다고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더 줄 법도 한데 남편은 아빠랑 약속했잖아, 라며 더 주지 않는다. 서러운 아이가 나에게 와서 과자를 더 달라고 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엄마는 줄 수 없어. 세 개만 더 고르고 싶다고 아빠한테 이야기해봐.”
억울한 아이는 제 의사를 아빠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아이 몰래 뚜껑 달린 컵을 들어 남편에게 보여준다. 남편이 아이에게 다시 말한다. “뚝딱이 부엉이 컵 가져와. 아빠가 컵에 과자 담아줄게.”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지난겨울 내내 친한 부부와 캠핑을 했다. 밤 9시가 넘었는데 여즉 쌩쌩한 아이를 재우러 텐트로 들어갔다. “아직 안 졸려 보이는데, 꼭 이른 시간에 재워야 해?” 아이가 없는 친구 부부가 물었을 때 남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놀러 나왔으니 늦게 자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주 양육자가 재워야 한다고 판단했으면 따라야지.”
부부가 일관된 태도로 양육하는 게 좋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30여 년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성인이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어렵다. 다행히도 자율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부모님 밑에서 삼 형제 중 첫째로 자란 우리는 큰 줄기의 가치관이 비슷하지만, 세세하게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나는 티브이 시청, 간식 섭취, 취침시간 등 생활태도에서 조금 더 규칙적이고 제한적인 태도를 취하고, 아이가 속상할 때에는 최대한 울리지 않고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편이다. 남편은 그 반대로, 평소에 규칙을 느슨하게 잡아두는 반면 속상해할 때에는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도록 기다린다.
잠은 방에서 자야 한다는 나와 거실에서 재워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남편이 부딪힐 때, 남편은 엄마한테 물어보고 오라고 가르친다. 나를 존중하는 남편의 태도에 “원래 잠은 방에서 자야 하는데, 오늘만 거실에서 아빠랑 자는 거야.”라고 대답한다.
일상에서 서로의 태도가 거슬릴 때에는 아이가 잠든 후 대화한다.
“당신이 정답을 정해놓고 아이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것 같아.”
“나는 아이가 혼자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아서 보기를 주는 건데, 그렇게 보였어? 고쳐야 할 것 같아?”
“그런 이유였다면 납득이 가네.”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에는 매를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도 그렇게 자랐고. 매와 맞는 부위를 정해놓고 체벌하면 돼. 어릴 때 나는 주로 발바닥을 맞았어. 때로는 사랑의 매도 필요한 법이야.”
“나도 많이 맞고 자랐고, 지금 잘 컸다고 생각하지만, 맞아서 정말로 반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맞았다는 사실만 기억나고, 그렇게 큰 잘못이었나? 억울할 뿐이야. 부모의 권위를 세우고 진심으로 반성으로 하게 하는 방법은 때리지 않아도 많다고 생각해. 거의 체벌하지 않았던 엄마가 나는 더 무서웠어. 아이는 때리지 말자. 어디를 어떻게 때리든 대응할 수 없는 약자에게 가하는 체벌은 폭력일 뿐이야.”
물론 아직도 여전히 서로를 보며 “왜 저러지?” 싶을 때도 있고, 썩 납득가지 않지만 일단은 수긍하는 ‘척’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아이 앞에서는 현재 말하고 있는 사람의 방침을 따른다. 이러한 일이 거듭될수록 저 남자랑 내가 한 팀이구나, 우리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구나, 하면서 동지애가 든다. 엄마랑 아빠는 같은 편이야. 아빠가 안된다고 하면 엄마도 안 돼!
마구 떼쓰다가 갈 곳 잃은 감정을 애착 이불에 의지하고 돌아온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말한다. “뚝딱이 다 울었어.” 결국에는 아이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엄마랑 아빠만 같은 편이라 널 괴롭히는 게 아니야.
사실 너도 같은 편이야!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