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대지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 그리고 고요함이 내려앉은 동네 덴톤
텍사스. 광활한 대지와 끝없이 펼쳐진 하늘 그리고 고요함이 내려앉은 동네 덴톤. 처음에 내가 놀랐던 것은 기숙사의 카페테리아였다. 여덟 개의 거대한 원형 기둥에 각기 다른 시리얼과 다양한 종류의 우유, 오믈렛 스테이션에는 취향껏 치즈와 채소를 골라 주문할 수 있었다. 소시지와 빵의 종류가 고급 여행지의 뷔페 수준을 뛰어넘었다. 양적인 면에서. 아침뿐만이 아니라, 점심과 저녁의 기숙사의 식사 시간에 난 충격을 받았다.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업 시간이 대부분 실기 위주가 아니라 이론 위주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노래를 부르러 갔는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선 이론을 마스터해야 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교수님이 있었는데, 교수님을 찾아가 개인지도를 부탁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다. 교수님은 집 안 청소를 부탁했다. 집은 거대한 궁전 같았다. 아무리 청소해도 끝나지 않았다. 사무실에서 교수님은 틈만 나면 엠엔엠 초콜릿을 자판기에서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키고 내게는 개인지도를 도통 해주지 않았다. 해주는가 싶으면 줄곧 졸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만했다.
학교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그들은 한국에서 음대 작곡과나 기악과를 졸업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점점 위축되었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전문 요리사들을 도와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일을 하면 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좋은 기회였다. 알렉스라고 디저트 섹션을 담당하고 있던 요리사가 있었다.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니며 오토바이를 끌고 다니던 어깨가 구부정한 사람. 헤비메탈 밴드의 가수이기도 한 이 사람은 내게 작업을 걸어왔다. 야성적이고 이색적인 끌림을 마다할 수 없기도 했고 불안한 내 상황을 잠재울 안식처가 필요하기도 했었기에 난 연애를 시작했다. 알렉스의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다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기분이 좋았다. 밤새도록 귀가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참아내기도 했다. 마리화나를 겉으로 피어대고 밤에는 그의 검은 티셔츠만 입고 누구의 집인지도 모를 지저분한 메트리스에서 잠을 잤다. 그 당시 나를 좋아하던 강남 케이블 회사의 부잣집 막내딸이 내게 방을 내어주고 있었다. 그녀가 내게 서서히 정을 떼어가고 있었다. 또한 다니고 있던 교회 사모님이
“제이씨, 왜 그런 남자를 만나요?”
하자
“저런 남자도 사랑 해 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하자 다시는 사모님이 내게 말을 걸어 오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결국 알렉스의 돌아가신 할머니 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곧 알렉스가 알코올중독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도.
학교를 옮겼고 방을 빌렸다. 전문 대학에서 뮤지컬과 모던댄스 수업을 들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홀로 사랑하는 마음을 토로하는 선율을 목청껏 토로했다. 마이너의 비장하고 음침한 기운에 눈가가 촉촉해질 때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과 수업 메이트들은 나를 칭찬하고 좋아했다. 갓 20살이 된 애들 눈에 정체 모를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넘어온 26살 여자가 미국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고 있다는 게 제법 신기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영화과의 실패는 연기 실력의 부족과 사회성이 문제이기도 했지만, 몸을 잘 쓰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재즈 학교 실패 후 뮤지컬 배우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기로 했으므로 댄스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웬걸 실력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춤을 출 때 가장 행복했다. 피아노 연주자는 통통 튕기는 반주를 하고 몸에 꽉 끼는 옷을 입은 학생들은 열 맞추어 고개를 세워 들고 선생님의 지휘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나중에는 마루 판매대에 가서 날아다니듯 한쪽 발을 들어 점프했다. 나는 꼭 맨 마지막 순서로 엉겨 주춤함에 따라 사람들을 따라갔다. 그 모양이 스스로 하도 웃겨서 쑥스러워하며 배시시 웃어댔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무척 다른 이야기지만 모던댄스야말로 나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내 영혼의 안식처였다. 뉴욕에 가서 뮤지컬 대학 오디션을 보았다. 시카고 뮤지컬 대학을 목표로 했지만, 그곳은 떨어졌고 뉴욕의 어느 전문 대학에 장학금을 제안받으며 합격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지만 장학금을 제외하고도 내야 할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더 이상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집에 가고 싶었다.
상담사는 미국에서의 도약을 내 전성기로 보는 듯했다. 내 최고의 모습인데 그런 힘을 내면 아이에게 불어넣을 수 있다고 했다. 꿈을 향해 온몸을 주저 없이 던졌다.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모국어가 아닌 미국어로 연기를 했다. 하지만 연기 자체보다는 스포트라이트가 좋았다.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막상 교수가 연극무대의 뉴욕 악센트를 쓰는 역할로 날 추천했을 때 거절했더랬다. 연기가 좋았다면 멋진 기회를 날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나쁜 남자를 만나 연애한 게 최고의 나일까? 미국에 가기까지 모든 것을 혼자 추진했던 것은 최고 나의 모습일 것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준비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세계로 떠났으니까. 사람들은 내게 뿌리에 대해 자주 말하곤 한다. 줏대가 없어서 자주 흔들리는 거라고. 누가 뭐라 하든 나만 괜찮으면 되는 거라고. 중심을 잘 잡아보라고 말이다. 난 그 말에 대해 수 없이 생각해 보았지만, 흔들리는 마음을 도통 잡을 수 없었다. 불안에 대해서라면 끔찍했던 일도 많다.
미국에서 뮤지컬 배우를 꿈꿀 때 행복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