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자체가 바로 저예요
사랑에 충만한 삶을 원했고, 사랑만 하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여겼다. 사랑 그 자체가 정체성인 듯 살았다. 지석이 없는 거리를 무작정 걸으며 추위에 못 이겨 다다 술집에 들어갔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온 동자승 같은 사장이 주문을 받았다. 그의 집은 술집 위에 있었고, 그림들과 물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 이불과 갑 티슈가 있었다. 나보다 10살이 많았지만, 중고 냉장고와 컴퓨터를 차곡차곡 들이고, 양념치킨과 파스타를 곁들여 요리를 해주며, 봄에는 꽃이 피는 언덕과 개울로 산책을 시켜주던 그는 미술학과를 중퇴하고 대학가에서 작은 술집을 운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술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미술과 오롯이 지내는 모습이 멋졌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나의 욕망이 아니었다. 돈 대신 그의 보살핌을 대가로 섹스를 내어주었다. 어느 날, 그의 목이 늘어난 흰 티셔츠를 입고 담배 냄새가 풀풀 나는 그의 청바지 허리춤을 몇 번 접어 입은 채 하염없이 걸었다. 노란 개나리에 내려앉은 햇살이 하도 풋풋하여 기분이 상쾌했다.
“과제 하셨어요?”
상담사가 물었다.
“네, 좋아하는 영화를 다시 봤어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요.”
“어땠어요?”
“센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좋았어요. 갑작스러운 역경을 담담하게 헤쳐 나가는 모습도요.”
“제이씨에게 사랑이 왜 이렇게 중요할까요?”
“사랑이요? 그건 제 전부에요. 사랑 없이는 살 이유를 모르겠어요. 사랑 그 자체가 바로 저예요.”
“처음 상담을 의뢰하실 때 다이어트약 중독이 큰 문제라고 말씀하셨지만,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죠. 사랑을 정체성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그 부분에서 불안을 느끼신다면 '내가 존재하는 걸까요?' 라고 생각해보셨나요?”
빈 껍데기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나는 없고, 타인만 존재하는 삶. 늘 남의 시선에만 신경 쓰다 보니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삶. 남편의 반응만 살피느라 그의 얼굴만 보고 고개가 꺾일 지경이 되었다. 상담사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인 것처럼, 나는 나를 사랑하지 못해서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다다 술집 사장의 집을 나와 직장을 구했다. 성인 영어 회화 강사직에 적성에 맞았고, 일이 끝나면 청계천을 따라 걸었다. 그 길에 매운 낙지집이 있었는데, 지석이 처음 소개해 준 곳이었다. 우리는 청양고추와 마늘 맛에 놀라 물을 연신 마셔대며 서로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웃었다. 매운맛에는 쉽게 무뎌지지만, 외로움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지는 법이 없다. 쓸쓸한 고독은 심장을 짓눌러 기어코 숨을 막아버린다.
나는 일을 하며 돈을 모아 미국으로 재즈 유학을 떠났다. 재즈 유학에 성공하면 한국에 돌아와 교수가 되어 실연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자수성가를 꿈꾸며 대학 합격의 영광이나 호주에서 기적처럼 말문이 트이게 된 흥분을 에너지원 삼아 불태웠다. 마법을 생각하지 않고서야 현실에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고독한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