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란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도약일 테고, 불안한 사람에게는 도피
“수아가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오래된 관계라도 헤어질 수 있다고 하더라. 그리고 한 달 정도 시간을 갖자고 했어. 전화 끊고 라면을 부숴 먹었는데, 눅눅해진 라면은 잘 안 부숴 먹는 편인데도 이상하게 끝까지 다 먹었어. 수프를 뿌려서 생각 없이 다 먹어버렸지. 아이스크림도 꺼내 먹고… 아, 또 왜 이런 걸까?”
언니에게 하소연했다.
“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수아는 네가 버림받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했으니, 네가 속상한 게 아닐까?”
언니의 통찰력에 놀랐다. 수아는 내 가장 친한 친구로, 그의 속 깊은 마음을 엿볼 때마다 그가 더없이 좋았다. 그런 수아를 죽을 때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언니는 사람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상황 판단에 탁월한 편이다.
“언니, 가치관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있어?”
“그럼. 그럴 수 있지. 만약 내 친구가 살인자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난 그 친구와 계속 지내기 어려울 것 같아.”
언니의 말에 깊이 생각해보았다. 상담을 통해 내가 얼마나 불안한 사람인지 깨달았고, 그로 인해 수아에게 많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특히 지석에 대한 이야기는 수아가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 중 하나였다. 나는 지석에게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석과 헤어지자고 말하면, 그는 언제나 내게 매달렸다. 그의 뜨거운 몸과 초조함 속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그는 나를 사랑했고,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랑에 허기질 때마다, 속으로 몇 번이고 그 사랑을 되새기고 꿀꺽 삼킬 묘약이 필요했다. 지석이 멀어질 것 같으면, 나는 일부러 트집을 잡아 헤어지자고 했다. 우리의 마지막 날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지석과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상미 씨에게 전화해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상미 씨는
“우리 감정 확인한 지 며칠 안 되었다.”
라는 충격적인 말을 전했다.
“8살 연상의 여인과 바람을 피운 거라니… 이게 무슨 이별 통보야?”
지석은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로 내게 소홀해졌는데, 나는 그것이 학업 때문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알고 보니 상미 씨와 사랑의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상미 씨는 여동생이 당시 내가 다니고 있던 대학원에 관심이 있다며 지석에게 부탁하여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다. 상미 씨는 짧은 머리에 동그란 눈과 풍만한 가슴을 갖고 있었고, 카디건을 허리에 묶어 자유로운 프랑스 여인 같았다. 우리는 모두 함께 점심을 먹고 미술관에 갔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지석의 시선이 줄곧 상미 씨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신을 상상할 수는 없었다.
지석은 신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육체적 사랑을 비도덕적인 행위로 여겼다. 우리 둘 다 첫 경험이었기에,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 지석은 섹스를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영화에서 본 것을 그대로 따라 하고 싶어서 맥도널드 화장실에서도 시도하자고 그를 데려갔다. 그를 곤란하게 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오르가슴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영화 속 배우들을 흉내 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지석은 항상 아가페적 사랑을 하자고 신신당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가슴 깊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어미 새가 자식을 사랑하듯 날 사랑해주었고, 매일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다. 부모도 내게 해주지 못한 사랑을 그가 내게 해주었다. 그 사랑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새로운 형태였다. 배은망덕하게도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가 벨을 눌렀다. 지석의 어머니는 호랑이 같은 성격이었는데, 지석이 엄마가 외출한 걸 확인한 후에도 그를 당황하게 한 것에 대해 지금도 아찔하다. 착한 지석이는 마지못해 나를 들였고, 해달라는 대로 수준급 이상의 기타 연주도 해주었다. 그의 형이 들어왔을 때, 나는 급하게 베란다에 숨었다. 그와 그의 형이 나누는 대화를 몰래 훔쳐보는 동안 심장이 쿵쾅거려 미쳐버릴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예상 밖의 일을 참아내야 했던 지석에게는 지옥과 같았을 것이다. 나는 그가 힘든 것을 참아내는 것을 보아야만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어쩌면 나는 그에게 버림받아 마땅했을 것이다. 지석은 성숙한 여성의 마음이라도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마음이 아픈 것이다. 지석이 떠난 이유가 내 탓인 것 같아서, 내가 좋은 사람이었으면 그가 떠나지 않았을 거라는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미안해도 이별을 도망치듯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건강한 이별이 아니었다. 나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지석이 돌연사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태어나서 아빠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고, 생애 처음으로 믿었던 남자에게 유기되는 기분은 참담했다. 지석에게 미성숙한 이별 방식으로 버려진 후, 나는 악한 본성이 날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대학원에 자퇴서를 내고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피웠다. 2006년도에는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일이 드물었다. 처음 피운 담배는 기침을 유발했지만, 남들의 고약한 시선은 이상하게 즐거웠다. 사랑이 필요할 때는 못생기고 자존감이 낮은 남자들을 찾았다. 나는 섹스 자체로 오르가슴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조금만 좋아해도 날 극진하게 대해주는 이들의 사랑을 갉아먹었고,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달래지지 않았다.
“지석이한테 안 미안해?”
수아가 계속 물었다. 수아는 대학 때 지석을 본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수줍고 착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맥도널드 화장실에 데려간 나를 거의 강간범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아는 날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겪었던 지석 편에 서 있었다.
“글쎄, 미안하지 않아. 내 인생을 망쳐놓았잖아. 사랑을 믿은 죄 밖에 없는데 벌이 이렇게 처참하네. 이제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수아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넌 지석이의 이별 방식도 제대로 알지 못해? 직접 만나서 잘 끝냈어야지. 왜 잠적하냐고!”
수아는 그의 서투른 이별 방식도 옹호할 수 없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수아도 지석 편을 들지 않았다. 수아는 내가 제멋대로 구는 것을 싫어하고, 특히 예상치 못한 행동에 크게 반응한다. 속상한 것은, 수아에게 내가 무례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아는 내가 타인에게 대하는 특정 행동 방식을 경멸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수아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걸까?
지석은 나를 버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별이란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도약일 테고, 불안한 사람에게는 도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