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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Jul 10. 2024

엄마 노릇

20대 초반 한창 멋 부리기 좋아하던 시절, 머리카락 전체를 노랗게 탈색했던 적이 있었다. 까맣고 튼튼한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만드는 데는 절차가 꽤 복잡했다. 시간도 오래 걸렸다. 거금을 들여 변신을 하고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금살금 집에 들어섰다. 


엄마가 보자마자 경악을 하셨다. 아빠는 화가 났는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으셨다. 

집에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밖에 나가면 최대한 늦게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내가 못마땅하면서도 안쓰러웠는지 내 편을 들어주셨고 상한 머리카락에 팩을 해주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금발도 싫증이 났다.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고 상한 머릿결이 회복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며칠 전 낮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너 머리 염색 안 했지 빨리 와봐 엄마가 해줄게!" 


마흔이 되기 전부터 새치가 나기 시작했다. 이틀 뒤면 작은 아이의 피아노 콩쿨이었는데 공부한다고 도서관만 왔다 갔다 하다가 미용실 가는 것도 잊고 살았다. 


운전대를 잡은 지 30분이 채 되지 않아 엄마 집에 도착을 했다. 엄마는 즐겨 쓰시는 염색약을 한봉 뜯어 휘휘 저어서 능숙한 솜씨로 내 머리에 발라주셨다. 엄마의 손길이 닿은 새치들은 한 시간 만에 감쪽같이 숨어버렸다. 


뿌리염색비 4만원이 굳었다며 신이 나있는 나에게 "한 달에 한 번은 염색을 해야겠네"라고 하셨다. 하필 잘 보이는 데에 새치가 났다면서 나보다 내 머리를 더 신경 쓰셨다. 


직접 만든 에센스를 챙겨주시고 푹 끓인 토종닭을 싸주셨다. 닭발에 콜라겐이 많으니 꼭 먹으라는 말과 함께...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엄마 속을 썩이며 돌아다니던 딸은 제때 새치 염색을 하지 않으면 눈에 거슬리는 나이가 됐다. 엄마는 나이 드는 딸이 안쓰러워서 여전히 엄마 노릇을 하느라 애를 쓰신다.


나는 언제쯤 엄마한테 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당신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 누군가에게 기댈 필요가 없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도로시 C. 피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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