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전히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남은 그 모든 것들을 주기 위해 기꺼이 손을 내어민다. 힘들면 엄마의 손을 잡으라고. 그러면 그뿐인 일이라고.
- 엄마도 엄마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장해주 지음 -
학교에서 돌아왔을때 집에 엄마가 없으면 괜히 심술이 났다. 아빠 일을 도와주러 공장에 가셨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잔뜩 나와 툴툴거렸다. 할머니도 나가시고 집에 아무도 없는 날에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현관문 아래 우유 투입구에 손을 넣어 더듬어본다. 손끝에 열쇠가 걸리면 끄집어내어 문을 열고 빈집으로 들어가 엄마를 기다렸다.
열쇠 놓고 가는 걸 깜박하신 날에는 집 앞 놀이터에서 엄마를 기다렸다. 한참 동안 모래를 뒤적이며 놀고 있다 보면 문방구가 있던 언덕너머로 엄마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 있어도 금세 알아봤다. 흙 묻은 손을 대충 옷에 문지르고는 한걸음에 달려가 엄마품에 안겼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한테 다 말해주고 싶었다. 100점 맞은 시험지도 보여줘야 하는데 엄마는 좀처럼 쉴 수가 없다. 뚱땅거리며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엄마는 온 집안을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걸레질을 하셨다. 일을 하시는 와중에도 잘 친다는 칭찬을 잊지 않으셨다. 엄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놀아주지 않는 걸 서운하게만 생각했다.
엄마는 항상 할 일이 많아 보였다. 밥이며 도시락이며 엄마의 부엌은 쉴틈이 없었다. 그때는 깨끗한 옷과 정돈되어있는 우리 집이 당연했다. 엄마가 매일같이 쓸고 닦은 덕분인지도 모르고. 세탁기도 청소기도 없던 그 시절. 온 가족의 치다꺼리를 하던 우리 엄마는 고작 20대였다.
아빠 일을 돕는 맞벌이 아닌 맞벌이를 하면서 맏며느리와 엄마로서의 역할도 잘해야 하셨다. 시댁과의 여러 문제들. 일일이 다 말할 수 없는 많은 일을 겪으시면서도 가족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셨다. 지금 와서 가만히 생각을 하다 보면 그때 엄마를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우리 엄마처럼, 엄마가 해온 것처럼 똑같이 하실 수 있으시냐고.
어릴 때는 잘 몰랐던 것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보였다. '엄마는 왜 그렇게 참고 살았을까. 왜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답답함과 속상한 마음에 나는 결혼해도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괜찮아
생선을 먹으면 우리에겐 몸통에 있는 살을 모두 발라주시고 엄마는 가시나 꼬리 쪽에 붙은 살만 떼어 드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엄마가 생선을 별로 안 좋아하신 다고 생각했다. 집안일은 하도 해서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줄 알았다.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던 것처럼 언제나 가족들이 먼저였다.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처럼 살 자신이 없던걸 지도 모르겠다. 나도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가족을 위하는 일은 힘듦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기꺼이 언제까지라도 자처해서 할 수 있음을.
70이 넘으신 우리 아버지는 다음생에 다시 태어나도 엄마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아빠에게 엄마는 아내이면서 어머니 같은 존재라고 하시면서. 힘들었던 세월을 묵묵히 함께 걸어오신 부모님을 보면서 '우리 부부는 이다음에 어떤 모습일까?' 하며 나의 미래를 그려보게 된다.
이제는 엄마가 힘들면 힘들다, 속상하면 속상하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다. 희생하는 모습이 아닌 엄마를 아끼고 위하는 생을 사셨으면 한다. 나도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즐겁고 행복한 모습.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어릴 적 언젠가 엄마의 서랍을 구경하다가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짧은 단발머리에 나팔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잡고 서있는 앳된 소녀. 어린 시절의 엄마였다.
"엄마는 어렸을 때가 생각나?"
"당연하지~ 다 기억나지~"
엄마의 어린 시절은 아주 까마득히 오래전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어쩐지 상상이 되질 않고 너무 옛날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할 것만 같았다. 사진으로 만난 엄마는 너무 어리고 예뻤다. 엄마도 하고 싶은 게 많고 꿈도 있었겠지? 사진 속 나팔바지를 입은 아이는 엄마가 되어 삼 남매를 잘 키워냈고, 이제 예순을 훌쩍 넘겨 어느덧 손주가 여섯 명이나 되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 내가 어찌 감히 엄마의 인생을 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