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데이비번스 문학상 수상
우리 모두에게는 누군가의 보살핌과 사랑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절이 너무나 짧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클레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부모와 함께 지내지만 사랑과 보살핌의 부재 속에서 살아갔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 묵직한 메세지를 전합니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얼마 동안 맡아달라고 하지?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그렇게 말하면 돼? 아빠가 말했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말해. 어차피 늘 그러잖아.
주인공 소녀는 엄마의 다섯번째 출산을 앞두고 여름방학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친척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아빠의 차를 타고 향하는 동안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집은 어떨까 궁금해하죠.
'따뜻한 우유를 마시라고 할까?' , '헛간을 청소하고 밭에서 돌을 골라내라고 시킬까?' 캄캄한 침실에서 다른 여자애들이랑 같이 누워 아침을 맞이하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이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깊이 담그고 목욕하는 건 처음이다. 엄마는 우리를 목욕시킬 때 물을 최대한 적게 쓰고, 가끔은 같은 물로 씻길 때도 있다. 잠시 후 나는 뒤로 누워서 증기 사이로 내 발을 문질러 씻기는 아주머니를 본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킨셀라 부부의 집은 아주 깨끗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없습니다.
"널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유아차에 타고있었는데" 아줌마는 내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고 말합니다. 소녀와 아빠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었습니다.
아빠는 서빙 포크 대신 개인 포크로 음식을 덜거나, 아줌마가 엄마에게 가져다주라고 전해준 루바브 줄기가 땅에 떨어져도 줍지 않습니다. 소녀가 먹을 것을 엄청나게 축낼거라 말을 하면서 감자에 약을 쳐야 한다는 핑계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차에 있는 소녀의 짐가방을 꺼내주지도 않은 채 그대로 싣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빠는 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떠났을까?'
아빠가 떠난 뒤 킨셀라 아줌마는 따뜻한 물로 소녀를 씻겨주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혔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으라는 말 대신 이불을 단단히 덮어주면서 커튼을 닫을지 열어둘지 물어옵니다.
아주 깊은 밤, 잠이 오지 않는 소녀는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와 침대 끝에 앉는 것을 느끼지만 눈을 꼭 감고 있습니다. 아주머니가 속삭입니다.
'불쌍하기도 하지,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
킨셀라 아저씨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더니 나에게 뭔가를 건넨다.
"그걸로 초코 아이스 하나 사면 되겠네"
내가 손을 펴고 1파운드 지폐를 빤히 본다.
"이 돈이면 초코 아이스 여섯 개는 사겠는데?" 아주머니가 말한다.
"애는 원래 오냐오냐 하는거지"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고마워요" 내가 말한다. "감사합니다"
"그래, 아껴서 잘 써라" 아저씨가 웃는다.
긴장한 소녀가 침대에 오줌을 싸도 킨셀라 아줌마는 방이 습해 침대가 젖었다며 소녀를 감싸줍니다. 소녀는 하루 종일 바지런히 움직이는 아줌마를 따라다니며 집안일을 도우면서 마치 엄마와 딸이 된 것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죠.
아저씨도 소녀에게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고 시간을 재주면서 앞으로 더 빨리 달려 시간을 단축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듯한 평범한 행복들이 소녀에게는 오히려 불안함을 주어 차라리 빨리 잘못되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는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달걀 요리와 토스트, 마멀레이드로 식사를 하고 킨셀라 아저씨가 나가고 나면 아줌마와 소녀는 함께 집안일을 했죠.
가끔은 저녁시간에 집에 사람들이 놀러 와서 아줌마, 아저씨와 함께 카드게임을 했고 소녀는 그 옆에서 마카롱을 먹기도 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아줌마와 함께 피부관리를 하고, 다 같이 아홉시 뉴스를 보고, 일기예보가 나오면 이제 자러 갈 시간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아줌마, 아저씨와 시내에 나가 새 옷을 사서 돌아왔던 날 저녁, 아는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킨셀라 부부와 소녀는 장례식에 가게 됩니다. 소녀는 그곳에서 만난 어느 여자를 통해서 킨셀라 부부의 상처와 비밀에 대해 듣게 되죠.
그날 밤, 소녀는 아저씨와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소녀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어쩌면 소녀에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합니다. 아저씨는 웃고 있지만 왠지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신발을 고쳐신으려 했을 때 아저씨는 소녀의 신발을 직접 신겨주고는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안아주었습니다.
아주머니가 똑바로 앉더니 편지를 뜯어서 읽는다. 그런 다음 편지를 내려놓았다가 집어 들고 다시 읽는다. "남동생이 생겼구나. 4.1킬로그램이래"
"참 잘 됐네요"내가 말한다.
"그리고 월요일에 개학이래"아주머니가 말한다.
"그럼 돌아가야 하는 거예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본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이제는 서로 많이 가까워진 탓에 수프도 약간 후루룩 거리며 먹습니다. 우편물 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어쩐지 아저씨는 달리기를 시키지 않습니다.
선물가게에 높다랗게 쌓여있는 노트와 책가방을 보고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건 곧 개학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죠.
아줌마는 소녀에게 책에 실린 스웨터들을 보여주며 뭐가 제일 좋은지 묻지만 도안이 전부 흐릿해지더니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소녀는 그중에 하나를, 쉬워 보이는 파란색 도안을 가리켰습니다.
"와, 여기서 제일 어려운 걸 골랐구나~ 이번 주에 시작해야겠다. 까딱하다가는 다 떴을 때 네가 너무 자라 있어서 입지도 못하겠어"
"정말 잘 지냈고 앞으로도 언제든지 맡겨도 돼"아주머니가 말한다.
"아주 좋은 딸을 뒀어, 메리" 킨셀라 아저씨가 말한다.
"책 계속 열심히 읽어라"아저씨가 나에게 말한다.
"다음에 왔을 때는 습자 연습장에 금별을 받아서 아저씨한테 보여주는 거다"
그런 다음 아저씨가 내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아주머니가 나를 안아준다. 나는 두 사람이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문이 닫히는 것을 느끼고 시동이 켜지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흠칫 놀란다. 킨셀라 아저씨는 여기 올 때보다 더 서두르는 것 같다.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차라리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얼른 끝내고 싶었죠. 당장 오늘 저녁에 데려다주면 안 되냐고 아저씨께 물어봤지만 우물에 빠져서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이틀 뒤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 집에 돌아갑니다.
오랜만에 돌아간 집은 축축하고 차갑습니다. 바닥은 더러운 발자국 투성이었죠.
"좀 컸구나"엄마가 말합니다. 언니들은 멀뚱히 보고 있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소녀의 원피스와 구두를 만져봅니다. 언니들은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더 마른 것 같고 더 말이 없어진 것 같았습니다.
"말썽은 안 부리던가요?"아빠가 킨셀라 아저씨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감기에 걸려 재채기를 하는 소녀를 보고는 그 꼴로 돌아왔냐고 핀잔을 주었죠. 아저씨에게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신다고 말을 합니다. 엄마는 다른 자녀에게 감기가 옮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킨셀라 아저씨와 아줌마는 서둘러 작별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줌마와 아저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녀는 그들을 향해 힘껏 달려갔습니다.
그 순간 소녀에게 중요한 것은 딱 하나밖에 없었죠. 심장은 쿵쾅거렸고 아저씨도 소녀를 보자 멈추어 서있습니다.
아저씨 품에 안긴 소녀는 아주머니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손을 놓으면 물에 빠지기라도 할 것처럼 아저씨를 꼭 붙들고 있었죠.
아저씨 어깨너머로 아빠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빠.. 아빠.."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이 책의 저자인 클레이 키건은 24년 동안 단 4권의 책만 냈습니다. 그만큼 한 권 한 권에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합니다. 나오는 작품마다 찬사가 쏟아지고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최대한 덜어내고자 했던 노력도 느껴집니다. 특유의 섬세함, 간결한 문장에 담겨있는 의미와 표현이 인상 깊었습니다.
맡겨진 소녀는 한 소녀의 성장 스토리를 넘어 인간의 상처와 치유, 그리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킨셀라 부부를 통해 소녀도 많은 성장을 했지만, 상처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킨셀라 부부도 소녀로 인해 위안을 얻은 듯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 아빠"라고 하는 소녀의 나지막한 외침. 다가오는 아빠를 향한 경고이자, 아저씨를 아빠로 불러보고 싶었던 마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서로를 채워줄 수 있는 킨셀라 부부와 소녀의 이별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클레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따뜻한 가정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세상의 모든 '소녀'들에게, 상처 입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그리고 그런 사람을 이해하고 돕고자 하는 이에게 추천합니다.
지금까지 책읽는제이 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