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란 7일 차, 처음으로 임신테스트기(임테기)를 집어 들었다. 임테기를 일찍 시작하면 '임테기의 노예'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난 노예를 자처한 성격무지 급한 여자. 너무 애타고 간절하게 기다리기 때문인 것쯤으로 미화시켜본다. 성공적으로 수정이 이루어졌다 할지언정 아직 수정란이 제대로 자궁 내 자리잡지도 못했을시기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임신 호르몬이 만수르 마냥 콸. 콸.설마 그걸 기대했던 난 참 많이도어리석고 조급했다.
단호박, 미워할 수 없는 단어
결과는 보란 듯이 비임신. 한 줄 밖에 보여주지 않는'단호박' 테스트기를원망스러운 눈으로 한참을 쳐다본다. 임신 준비를 해본 사람만 안다는 '단호박'이라는 단어. 매정하게 희미한 시약 선도 보이지 않고 한 줄만 칼 같이 보일 때 쓰는. 난임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는 가슴에 비수를 꽂는 단어이지만 '칼 1자' 이런 이름 대신 '단호박'이라니 정겹기까지 하다.
다음날은 5월 8일 어버이 날이었다. 손주를 애타게 기다리는 엄마에게 어버이날 선물로 '짜잔~'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에 아침에눈을 뜨자마자 화장실로 직행. 또 한 줄. 단호박. 맘찢.
배란 9일 차, 오늘은 뚫어지게 쳐다보면 보인다는매직아이 선이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결과는너무 허무하게도 한 줄. 또또 단호박. 이러다 두줄이 나타나 주면 하늘을 날듯 기쁘고 감사하겠지만, 이대로 홍양(생리)이 찾아오면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같단 생각에덜컥 겁이 난다.
아무렇지않다는 듯 출근을 했다. 다행히도 회사에 있는 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가 있다.나의 로망인'돈 많은 백수'였다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테스트기의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으리라. 미팅이 끝나고 논의된 내용을 정리하고 있는데 왼쪽 아랫배가 '콕콕' 아파 온다. '생리 전증후군인가? 기왕이면착상 통이었으면 좋겠다'는 맘도 잠시 쌓여가는 업무와 사투를 벌이다보니 하루가 무심히 흘러간다.
초초초 매직아이 선의 등장
임신 테스트기는 호르몬이 가장 왕성한 아침이 적기라고 했으나 오늘 밤 난 다음날 아침까지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난 '임테기 노예'이니까. 오늘 낮에 느낀 통증은 젤리곰이 나에게 '콕콕' 노크를 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5분 경과. 간절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초초초초 매직아이 선이 보인다. 심장이 쿵쾅쿵쾅나대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내 눈에만 보이는 선이라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다. '내일은 조금 더 선명 해 질까? 내일 아침까지 어떻게 기다리지?'라는기분 좋은 상상과 함께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가 하나밖에 없는 사위의 생일이라고 정성껏 준비하신 음식과 함께 신혼집을 방문하셨다. 오늘은 꼭 엄마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다는 들뜬 마음에 남편에게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얼리 임신 테스트기'를 사 오라고부탁했다.지난밤에 내 눈에만 보이는 희미한 선을 보았기에 남편에게 부탁하면서도 괜한 기대감을 주는 건 아닐까 하는 맘보다 아주 조금은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다행히도'얼리 임신 테스트기'는연하지만 또렷한 선을 그렸다. 배란 10일차 였다. 흥분된 마음으로 엄마에게 달려갔다.
파란색 얼리 테스트기, 분홍색 일반 테스트기
"엄마, 보여? 여기 있는 희미한 선 보이냐고~" "뭐가 보인다고? 내가 노안이라 안 보이는 건가?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러니까 일반 오른쪽은 분홍빛으로 희미한데 왼쪽 얼리 테스트기는 희미한 선이 보이잖아! 안 보여?!" "아... 그렇게 비교하니 하나는 선이 있는 것 같아! 축하해"
엄마는 함박웃음과 함께너무 잘됐다며 박수를 치신다. 오랜만에 엄마의 밝은 표정을 보는 것 같아 한껏 기분이 좋다.난 엄마의 그런 모습에이젠 남편에게 말할 자신감이 생겼는지 남편에게 쪼르르 달려가 테스트기를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자기야, 이거 선 보여? 보이지? 아기가 생겼나 봐~" "으으으응~ 우와! 신기하다! 좋다 좋다! 오예에 에! 황금 꿀꿀이 베이비닷~"
뭔가 엄마와 남편을 강요와 억지 비슷하게 선이 보이는 것으로 동의하게 만든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내 마음 한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