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 아르제날 극장에서 <선라이즈>를 보다
독일에서 꼭 가보려고 했던 곳 중 하나가 소위 '공공상영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관들이었다.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상업영화 외에 다양한 문화, 장르, 주제, 미학 등을 담고 있는 다양한 영화들을 상영하고, 관련 부대프로그램도 진행하는 곳이다. 우리로 치면 시네마테크나 일부의 독립·예술영화관 정도가 되겠다.
우리로서는 영화의 문화적·공공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직 일반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공공적 성격의 영화관들이 대부분의 도시마다 존재하는 것은 물론, 영화관에 대한 국가적 지원, 그리고 어린이와 젊은 세대들을 위한 영화관 안팎의 교육적 지원 등이 활발한 독일의 모델은 눈여겨보고 또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다. 이미 60년대부터 시네마테크나 예술영화관 등에 국가적 지원이 있었던 유럽과 우리나라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해도, 영화를 산업과 동시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자 예술로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이는 문화의식과, 그에 따라서 이를 중요한 국가적 정책으로 실행하는 것은 부러운 것이 사실이다.
짧은 여행 기간 동안 고작 몇 군데 영화관을 방문해 본 것뿐이라 이 글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한 현장(?) 몇 곳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더 세부적인 조사를 위한 다음의 기회를 기약하며.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바로, 베를린의 아르제날 극장(Arsenal - institut für film und videokunst e.V. / http://www.arsenal-berlin.de)이었다. 이곳은 1970년, '독일 시네마테크 친구들'(Freunde der Deutschen Kinemathek)이라는 동호회 회원들을 위해 전용극장으로 개관한 독일 최초의 비상업적 상영관이다. 작은 상영회를 개최하던 동호회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독립·실험영화, 신진 감독들의 영화, 다양한 국가와 작가들의 영화 등 다채로운 프로그래밍으로 정기 상영을 진행할 뿐만 아니라, 베를린영화제의 포럼 섹션(Berlinale Forum) 프로그래밍을 담당하고 있으며, 배급과 아카이브로서의 기능도 하고 있을 만큼 꽤 내실과 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곳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어떤 프로그램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종종 뉴스레터를 받아보고 있었는데, 실제로 그곳에 가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르제날 극장은 베를린 중심가이자,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곳이기도 한 포츠다머 플라츠(Potsdamer Platz)의 소니센터 안에 있는 2개 관의 작은 영화관이다. 바로 옆에는 영화박물관과 멀티플렉스 극장도 있다. 나의 목표는 장소에 가 보는 것 외에 그곳에서 영화를 한 편 골라보는 것이었다. 독일 교환학생을 다녀온 지도, 대학을 졸업한 지도 10년이 지난 데다, 남편과 함께 방문한 그곳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있으려나, 하며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프로그램들을 살펴봤다.
오, 이거다! 다운받아서 혹은 기획전 등에서 보려고 했으나 아직 보지 못했던, 거기다 무려 무성영화(!)인 이 작품. 바로 F.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가 우리가 베를린에 머무는 날짜 중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좋았던 건, 이 날 영화 상영과 함께 요즘 한국에서도 왕왕 진행되고 있는, 피아노 연주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이다. 본래 티켓 가격은 8유로인데, 공연이 추가되어 9.5유로를 지불하고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10년 전, 독일 어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후, (지금은 없어진) 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게스트 통역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아직 생생한(?)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당시에, 영화제 게스트로 왔던 지휘자 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귄터 부흐발트(Günter A. Buchwald)씨를 따라다니며 수행통역하는 일을 했다. 무성영화 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끈 선구자이기도 한 이분은 당시 영화제에서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를 상영하는 동안 라이브 피아노 연주를 보여주었다(그때 나는 이 분을 잘 몰랐는데, 무성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연주를 하는 것을 처음 본 데다가 피아노 연주와 바이올린 연주까지 하고(당시에는 피아노 연주만 했는데, 둘을 동시에 연주하기도 한다고 했다), 지휘와 작곡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대단하고 멋진 분이다! 게다가, 젠틀하기까지 했다).
이때가 2008년이었는데, 내 생각에 국내에서 이런 무성영화 상영과 함께 피아노 연주 프로그램이 이루어진 것이 이때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에서 최근 이런 피아노 연주가 진행됐었고, 2015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전에서 심지어 귄터씨를 직접 초청하기도 했었다. 가 보지는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에 페이스북으로 귄터씨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나를 기억하고 있어 반가웠던 기억도 난다. 어쨌든, 2008년 충무로영화제 당시, 이 프로그램과 함께 한국영화(<청춘의 십자로>였던 것 같다) 상영과 변사 공연 프로그램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잊고 있었는데, 서늘한 가을밤에 남산 한옥마을 야외무대에서 두 공연을 봤던 그때가 아련하다......
아르제날 극장에서도 <선라이즈> 상영과 함께 피아노 연주 공연이 있었다. 한국에서 뉴스레터로 받아봤던 프로그램이 너무나 다채로와서, 극장 규모도 크려나 싶었는데, 내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평균의 한국 독립·예술영화관과 비슷한 정도의 규모. 그렇지만 부러웠던 건, 40명가량의 그렇게 많은 인원은 아니라 해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좌석을 채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코트를 차려입은 백발의 할아버지부터, 중년의 여성, 20대 젊은이, 그리고 우리, 동양에서 온 이방인까지.
마치 연극무대처럼, 스크린을 덮고 있는 붉은 커튼이 열리며,
이 낯선 곳에서의 영화 관람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