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동료가 최근 고양이 집사가 될 '뻔'했다. 냥이를 좋아하지만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므로, 엄두가 안 난다는 이유로, 키우는 것은 안 된다고 하던 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연 인즉은, 얼마 전 태풍 '솔릭'이 몰아치던 날, 남편분이 빗속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구출해 집에 데려온 것이다. 태어난 지 고작 2주 정도밖에 안 된 새끼에, 더 안타까운 것은 그 옆에 있던 다른 한 마리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했다. 누군가 상자 채로 버린 모양...
구출한 한 마리마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아서 24시간 동물병원을 수소문해 데려갔다고 했다. 몸에 벌레와 구더기가 많아 제거하고 집으로 데려오니 죽은 듯 자더라고. 손바닥에 다 놓일 만큼, 정말 작은 새끼였다. 그렇게, 동료분과 남편분은 고양이 집사로, '선택'받는 듯했다.
그런데,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 동료분에게 연락이 왔다. "냥이가... 떠났어요." 병원을 세 군데나 갔지만 너무 아기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고, 집에서 분유를 먹이고 배변시키고 재우고, 좀 기운을 내는가 싶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결국 떠나버리고 말았다고.
선택받고 선택함으로, '가족'이 되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에서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추운 날씨에 집 바깥 복도에서 놀고 있는 유리(사사키 미유)를 발견하고 몸만 녹여 다시 보낼 요량으로 집으로 데려온다. 하츠에 할머니(키키 키린)는 유리의 온몸에 난 상처를 보고 상황을 감지하지만, 아이를 '유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함께 저녁을 먹은 뒤 오사무와 노부요(안도 사쿠라)가 함께 유리를 집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찰나, 노부요는 유리의 부모가 아이를 두고 싸우는 소리를 듣고는, 유리를 안은 채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내가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는 원망과 후회의 말. 노부요는 "우리, 선택받은 거"냐고 말한다.
한동안 유리를 보살피지만 진짜 부모는 실종 신고조차 하지 않는다. 급기야 뉴스에까지 유리 이야기가 나오자, 이 '가족'은 유리를 돌려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유리에게 집에 돌아갈지 말지 선택하도록 한다. 예상과는 달리 이 수상한 가족 안에 남겠다고 하는 유리는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사고, 입고 왔던 옷을 태운 뒤 '린'이 된다. 노부요는 "가족을 선택할 수 있는 게 더 강한 것 같다"고 말한다.
유리뿐만 아니라, <어느 가족>의 구성원은 모두 선택하거나 선택받아 가족이 된다. 겉으로는 평범한 가족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되면 이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아님을 알게 되고, 그 사연들이 한꺼풀씩 벗겨진다. 영화는 '몸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오사무와 노부요의 사연을, 차가운 발끝만으로도 아키(마츠오카 마유)의 기분을 알아차리는 하츠에의 어떤 '섬뜩한' 선택을, 파칭코 주차장 차 안에서 발견되어 오사무, 노부요와 살기로 선택한 쇼타(죠 아키리)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줌으로써, 이들의 관계나 유대가 혈연의 그것보다 비정상적이라거나 이상할 것이 별로 없음을 설득시켜 나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해 온 감독이다. <아무도 모른다>(2004)에서 아버지가 서로 다른 아이들은 어떻게든 함께 모여 살기 위해 사회의 보호를 거부하지만, 엄마는 새로운 남자와 살기 위해 집을 떠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에서 수십 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세 자매는 이복 여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를 가족으로 들이고,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에서는 엄마, 아빠의 이혼 때문에 각각 떨어져 지내는 두 형제를 통해서, 가족이 함께 사는 것과 각자의 세계를 품고 헤어져 사는 것에 대해 질문한다. 6년 간 키운 아들이 알고 보니 태어날 때 병원에서 바뀐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도 있다.
감독이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가족을 절대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언급한 몇몇의 영화와 <어느 가족>에 이르기까지, 그가 가족의 정의 혹은 관습적으로 설정하는 어떤 '가족상'에 대해 물음표를 그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부모나 자식을 선택할 수 없는 혈연의 가족과 달리, 함께 살기로 '선택'하는 가족이 때로는 더 '강할' 수 있다는 노부요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쇼타의 선택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선택의 가족' 역시 온전할 수 없다. <어느 가족>에서 이들은 일본이라는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위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유리와 쇼타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에서 '유괴'라고 칭하는 일을 하고, 생계비를 아끼기 위해 일상적으로 좀도둑질을 하며, 계속해서 하츠에의 연금을 타기 위해 사망신고 대신 직접 그녀를 땅에 묻는다. 전과가 있는 오사무는 산재 처리가 되지 않는 일용직을 전전하고, 세탁 공장 계약직 노동자인 노부요는 '워크 셰어'에 이어 해고까지 당한다. 감독은 이러한 생활이 언제까지고 유지될 수 없음을, 이 가족의 '화양연화'도 언젠가는, 그리 오래지 않아 끝이 날 것임을 알고 있다.
유일하게 이런 생활에 의문을 품는 인물은 쇼타다. 어느 날 쇼타는 작은 물고기가 큰 참치를 무찌른다는 '스위미' 이야기를 오사무에게 들려준다. 그리고 나중에 어느 장면에서 스치듯 그 이야기가 다시 등장하는데, 쇼타는 "참치가 왠지 안됐다고", 오사무는 "친구들을 괴롭혔으니 괜찮다"고 말한다. 좀도둑질에 대해 "망하지 않을 정도만 훔치는 건 괜찮지 않겠냐"거나, "유리도 같이 해야 함께 살기에 덜 불편하지 않겠냐"는 등 노부요나 오사무의 말에 쇼타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하지만, 그렇다고 쇼타의 고민이 해결된 건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유리와 함께 문구점에서 좀도둑질을 하다가 "동생한테는 시키지 말"라는 문구점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얼마 후 그 문구점이 문을 닫은 걸 본 이후(문에는 상중(喪中)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 뜻을 모르는 쇼타는 "망했나"라고 말한다), 쇼타는 마트에서 도망쳐 나와 일부러 붙잡힌다.
쇼타의 행위를 단순히 유리의 좀도둑질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좀도둑질을 알고도 묵인해 준 문구점 할아버지의 존재를 알게 된 후에, 그리고 어쩌면 문구점이 자신 때문에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학교는 집에서 배울 게 없는 애들이나 가는 거"라고 말하곤 하던 쇼타는, 어쩌면 집에서 배울 수 있는 것들 외에도 바깥세상에 다른 것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스위미'도 안 됐지만, 참치에게도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쇼타가 더 어릴 적 '가족'을 선택했을 때처럼, 이번에는 그 가족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하는 쪽으로 쇼타는 나아간다.
두 세계, 다른 언어
<어느 가족>의 후반부 장면은 사회 시스템 내에서 이 가족이 얼마나 다른 언어로 이야기되는지, 얼마나 연약한 토대 위에 놓여있는지를 보여준다. 각 인물들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심문하는 이의 언어는 지금껏 우리가 봐 온 영화 속 가족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의 언어와 외화면에서 들리는 '사회'의 언어는 충돌하며, 인물들의 복잡 미묘한 얼굴을 통해 두 세계의 괴리를 극명하게 느끼게 한다.
두 개의 세계는 융합될 수 없기에, 이들은 이제 '가족'의 자리가 아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가족의 외형은 무력하게 와해된다. 하지만, 이것을 '와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쇼타는 오사무와 헤어지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작게 내뱉고, 유리는 여전히 복도 난간 너머를 바라본다. 하츠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혼자 내뱉었던 "고마웠다"는 말을, 다른 이들도 저마다 마음에 품고 있을 것이다.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때론 선택을 통해 가족이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제 동료처럼, 그리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처럼 내가 원해도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어떤 경우이든 삶 속에서 타자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선택의 범위를 스스로 넓혀갈 수 있는지인 것 같습니다. 소위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과 잘 지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내 삶 속으로 초대하려면 큰 용기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만큼이나 용기를 내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