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가 13만 명을 넘어섰다. 2009년 영화 <똥파리>가 여러 해외 영화제 수상과 10만이 넘는 관객을 돌파한 이래로 10년이 흘렀지만, 그 사이 독립예술영화 상영과 관람 환경은 오히려 악화되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영화관 한쪽 벽면 창을 통해 쌓인 눈을 볼 수 있었던 혜화의 '하이퍼텍 나다'를 비롯해 많은 독립예술영화관이 문을 닫았고(느낌은 좀 다르지만 지금은 이수역에 있는 '아트나인'에 가면 이런 창이 있는 상영관을 만날 수 있다), 대형 상업영화와 독립예술영화의 관객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18년 한국 독립예술영화 시장점유율이 한국영화 관객 전체의 0.51%에 불과하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이런 상황이니 <벌새>의 스코어가 반가울 수밖에. 13만이면 뭐가 많은가 하겠지만, 한국 독립예술영화 스코어가 1만 명이 넘으면 '1만 파티'를 하곤 했으니 엄~청 높은 수치다. 그 수치에 나는 2명 분을 기여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때 은희가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아서 더 슬프고 또 더 좋았다.
<벌새>는 영화 속 은희(박지후), 그리고 영지 선생님(김새벽)이 그런 것처럼 조용하지만 꽤 힘이 센 영화다. 이 영화에는 쉬이 간과되곤 하는 일상의 많은 슬픔이 있고 그 슬픔이 쌓이고 쌓여 무너져 버리지만 또한 그 슬픔을 안아주려는 몸부림과 따듯한 시선이 있다. 자잘한 에피소드와 감정들, 좋은 대사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은희의 마음과 만나게 된다.
김보라 감독의 2011년 단편인 <리코더 시험>을 보면 은희의 세계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코더 시험>은 <벌새>의 은희와 가족들의 6년 전 모습, 그러니까 88 올림픽이 있던 해 은희 가족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리코더 시험>의 주인공 역시 '은희'이고 똑같은 대사도 여럿 등장하며 심지어 배우 정인기가 똑같이 은희 아빠로 나온다). 방앗간을 하며 바쁜 부모님, 그런 부모님에게 관심받고 싶은 은희, 어릴 때부터 시작된 오빠의 폭력과 부모님의 차별 혹은 무관심, 단짝 친구와의 관계 등등, 두 편의 영화를 시간의 흐름대로 대략 이어 붙여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을 거다.
<벌새>의 첫 장면은 어쩌면 <리코더 시험>의 연장선 상에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은희가 엄마와 맺고 있는 결핍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씬을 오프닝에 배치한 것인데, 처음 영화를 볼 때 이 장면이 나에겐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은희의 세계에 아직 진입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수년 동안 살아온 집의 층수를 착각한다는 것, 심부름을 다녀오는 상황에서 엄마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연신 초인종을 눌러대는 긴박함이 낯설었다. 이 오프닝이 영화의 중간 즈음 은희가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서 대답 없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과 함께 은희의 마음 상태를 은유한 어떤 환상 혹은 꿈의 이미지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영화를 두 번째 보고 <리코더 시험>을 보고 나니 좀 더 납득이 갔고 그게 실제이든 꿈이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은희가 가족 안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결들-결핍, 분노, 실망, 동시에 안도-은 단짝 지숙(박서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후배 유리(설혜인), 영지 선생님 등 외부 세계와의 만남으로 확장되어 뒤섞인다. 거기에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 폭력이 묵인되는 세계, 사랑과 우정이라는 견고해 보이는 성이 무너지는 세계, 계급과 자본이 일상 곳곳에 침투한 세계가 있다. <벌새>는 때로는 조용하면서 서늘하게, 때로는 다급하게, 때로는 꿈처럼 그 뒤섞인 세계를 그려낸다.
사실상 <벌새>에는 이질적이고도 꿈같은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은희가 친구 지숙과 함께 지하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관통해 가장 튀는 장면이고, 은희가 영지 선생님의 소포를 받기 직전 거실에서 음악에 맞춰 춤인지 뜀박질인지 무언가 화풀이를 하는 장면 또한 이질적이다. 한밤 중에 은희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찾아온 영지 선생님은 어떤가. 어쩌면 은희에게 왔다가 홀연히 사라진 영지 선생님 존재 자체가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이런 이질적인 장면장면들은 붕괴된 성수대교의 이미지만큼이나 강렬히 남아있다. 이 장면들은 은희의 감춰둔 마음이 분출되거나, 은희가 외부 세계로부터 크게 영향받는 순간들의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꾸만 커지는 혹을 제거하고 퇴원한 은희를 보며 약간의 안도를 느낄 즈음, 영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닥뜨린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켜켜이 쌓인 슬픔과 위태로운 은희의 세계는 다리와 함께 무너져 내린다. 이전 은희의 슬픔이 가족, 친구, 후배와의 관계 등 주변의 것들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커다란 사건은 은희로 하여금 또 다른 슬픔에 직면하게 한다. '집을 빼앗기는 사람들'과 연결될지도 모르는 사회의 슬픔을, 그리고 자신의 우주를 확장시켜 준 선생님과의 이별을 은희는 마주해야 한다.
영지 선생님으로 인해 은희는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사람의 얼굴이 아닌 마음을 안다는 것,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참지 않는 법, 거절하는 법에 대해 배운다. 은희는 수술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아빠를, 감자전을 부쳐주는 바쁜 엄마를, 자꾸만 겉도는 언니를,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리는 오빠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관계의 상처를 남긴 이들과 멀어지는 법도 알게 됐을 것이다. 병실에서 반찬을 챙겨주는 아주머니와 진단서를 끊어주겠다는 의사 선생님의 온기를 기꺼이 느꼈을 것이다.
이 하나하나의 조각들이 바로 영지 선생님이 말한 세상의 "신기"와 "아름다움"이 아닐지, 은희는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다. 이건 마치 전등이 깨질 정도로 심한 부부싸움을 하고도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으며 TV를 보는 부모님의 신비 같은 것이랄까.
영지 선생님이 "이제 없다는 게 이상"할 뿐 믿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던 은희는 사고를 모면한 언니와 함께 무너진 성수대교 앞에 서고 나서야 선생님 방 안에서도 꾹꾹 눌러 참은 울음을 조용히 흘린다.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모인 아이들의 이미지는 성수대교 붕괴와 세월호 참사를 잇는다. 그 이미지에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옳을지는 몰라도,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신비 앞에서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머뭇거리는 은희의 오묘한 표정은 최고의 엔딩이다.
은희는 그 오묘한 엔딩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무력함 앞에서도 기어코 손가락을 움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