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계속 추워지더니 밤새 눈이 소복이 내렸다. 최대한 옷을 껴 입고, 하루 동안 우리의 모든 이동을 책임질 바덴뷔르템베르크 티켓(https://brunch.co.kr/@j-zoom/45)을 들고 새벽녘에 길을 나섰다.
두 시간 남짓 프라이부르크를 향해 달리는 길은 그야말로 겨울왕국이다. 3월에 이런 날씨가, 이런 풍경이 펼쳐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헛웃음이 난다. (롱패딩 가져올껄...) 그래도 아름답기 그지없으므로, 위안이 된다.
프라이부르크에 도착해 반가운 친구를 만났다. 대학 석사 입학을 준비하던 시기 이 도시에서 살다가 지금은 만하임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다. 역시 현지인은 날씨를 잘 알아서, 겨울 코트에 어그부츠, 털모자까지...! 준비성이 부족한 나를 탓해야 한다.
‘환경수도’, ‘태양의 도시’ 프라이부르크. 기분 탓인지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다. 시민들의 반대로 원자력 발전소 건립이 무산됐고, 오랜 시간 녹색당에서 시장이 선출된 도시(최근엔 무소속의 젊은 시장이 당선되어 파란을 일으켰다고). 그중에서도 "보봉(Vauban)마을"은 시민들과 프라이부르크시가 협력해서 조성한 친환경 마을로 유명하다. 협동조합 형태의 연립주택들이 많은 이 마을은 단열 시스템을 통해 주택의 에너지 사용량을 최소화하고(일명 패시브 하우스), 태양광, 지열 등 신재생에너지로 자체 전기를 모두 생산하거나(제로 에너지 하우스), 심지어 어떤 곳은 전기가 남아 수익까지 낸다고(플러스 에너지 하우스) 한다.
우리나라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태양광 장비 설치를 지원하는 등 신재생에너지 생산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긴 하지만, 전방위적인 '녹색 정책'을 시행하기에는 여전히 시민들의 삶의 방식이나 의식이 충분히 무르익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주마다의 분권이 잘 되어 있는 독일과 대도시 위주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한국의 상황을 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전 폐쇄', '친환경 도시'라는 기치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친환경 도시로의 전환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모습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춥긴 해도 나무며 집이며 길이며 새하얗게 쌓인 눈을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고 사진 셔터를 계속 누르게 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보봉마을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마을이 한눈에 보인다. 이토록 자연으로만 둘러싸인 곳에 내 몸이 놓여있다는 것이, 대지를 걷고 있다는 것이 몹시도 충만한 느낌을 선사했다. 평화롭고, 평화롭다. 눈밭에 신이 난 강아지들과 언덕 기슭에 썰매를 가지고 나와 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곳의 아이들과 서울 어느 곳 대도시의 아이들은 얼마나 멀리 있나, 생각한다.
보봉마을을 나와 점심을 먹으러 시내로 간다. 원래 주말이면 마켓이 열린다는 뮌스터 플라츠는 추위와 눈 때문에 텅 비어있다. 대성당은 무슨 내부행사 때문에 들어갈 수 없고 겉은 수리보수 중이다. 시장이라면 빼놓지 않는 나로서는 아쉬움 가득이지만, 그것도 잠시, 친구가 맛집이라며 소개한 멕시칸 레스토랑으로 룰루랄라 향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탓인지 따듯하고 맛있는 음식에 몸이 녹고 힘이 난다. 멕시칸 음식을 앞에 두고 눈 덮인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독일인지 어딘지 장소감각이 없어진다. 어딘들 어때.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이 있음에 감사하다.
일요일인지라 아이들과 가족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었던 마을극장 코뮤날레스 키노 Kommunales Kino를 거쳐(극장에 대한 내용은 이전 포스팅 <조금 특별한 영화, 영화관-⓶> 참조 https://brunch.co.kr/@j-zoom/18), 드라이잠 강가도 걷는다. 내린 눈 덕분에 강물이 꽤 불어나 있었다.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지만 걸어도 걸어도 질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 모습을 곧 다시 볼 수 없겠지, 아쉽기만 하다. 강 끝쪽에는 프라이부르크 프로축구단 전용구장이 있는데, 축구장 지붕에도 태양광 집열판이 설치되어 있어 전력을 생산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바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무려 1457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지닌 종합대학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DIE WAHRHEIT WIRD EUCH FREI MACHEN)"라는 문구가 새겨진 오래된 건물과 맞은편 검은 유리로 지어진 도서관 건물이 대비를 이루며 매력발산. 친구의 설명에 따르면, 일정 금액을 내면 일반 시민들도 평생 책을 대여할 수 있다고.
여행자 주제에 신성한(!) 도서관에 들어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학구열로 몸을 덥혀본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는 독일 외 100개국 이상 약 16% 정도의 국제 학생이 있다고 하는데, 도서관에 들어가 보니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하기에 제법 어울리는, 친구의 부탁으로 한국에서 사 온 책을 전달하는 것을 끝으로, 친구와는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독일에 남을 친구도, 여행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나도, 각자가 지금 갖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그리워하고 또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최근 <알쓸신잡>에 프라이부르크 편이 방송됐다. 나는 미처 몰랐던 것인데, 프라이부르크 시내 바닥에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을 표시해둔 돌이 곳곳에 있었고, 출연자들은 연신 바닥을 보며 독일의 아픈 역사를 상기했다. 친환경을 내세우는 이 작은 도시에서조차도 사람들은 기억해야 할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한 가지 방송을 보면서 공감했던 것은 과학박사인 김상욱 박사가 했던 말이다. 재생에너지를 개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에너지를 적게 써야 한다는 것. 프라이부르크가 신재생에너지 연구에 열을 쏟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도시가 친환경의 맑은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의 에너지 정책에서 에너지 효율과 에너지 절약이 함께 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단열이 잘 되는 집을 짓거나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동차보다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더 많이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의식,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도시를 만들어나가는 노력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걷고 또 걷느라 춥고 다리도 아팠지만 이 두 가지를 감수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지금 같은 프라이부르크의 기억은 없을 것이다. 환상의 겨울왕국을 보려면 어느 정도의 추위를 감수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자연·지구와 함께이고 싶다면 약간의 편리함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거창한 건 어렵지만, 아주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볼 수 있다. 바로 나부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