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어떤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 사람은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남의 흠을 들출 땐 본인의 미흡함도 같이 드러난다. 본인의 미흡함을 과감하게 공유해준 건 고마웠지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여졌다. 실컷 남을 씹고 나면 대화의 끝엔 항상 텁텁함이 남았다. "나한텐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는데, 그런 모습도 있었구나"라며 영혼 없는 대답을 하고 넘겼다.
나에게 보인 그의 모습도 그의 일부분일 테지만 다른 이에게 보인 모습도 그의 일부분 일 것이다. 다만 그가 나에게 나쁘지 않은 일부를 보여줬던 건 우리가 나쁘지 않은 사이이기 때문 아닐까.
한때 나는 누구에게나 나쁘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대에게 나의 모난 모습이 드러나진 않을까, 내 본모습이 상대에게는 맞지 않는 모습일까 싶어 적당한 선에서 감정을 드러내고 감췄다.
나와 성격이 비슷한 현우라는 친구가 있다. 현우는 여자친구에게 나쁘지 않은 남자친구이고 싶어서 여자친구 감정에 자신을 맞췄다. 물아일체 경지의 오른 그의 모습을 본 여자친구는 챗봇과 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공허함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은 내가 감췄던 나의 본모습도 현우가 여자친구를 위해 맞췄던 감정도 모두 상대를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배려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사이가 있다. 나쁘지 않은 사이가 나쁘게만 느껴지는 사이.
'나쁘지 않은' 관계는 무슨 사이일까.
'나쁘다'와 '않다'라는 부정에 부정을 붙여가면서 좋음을 부정하고 싶은 사이라면 관계를 진전시키거나 더 이상 알고 싶어 지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나쁘지 않은 관계만큼 공허한 사이가 또 있을까.
종종 회사에서 내가 누구와도 대체 가능하단 생각이 들 때면 존재의 회의감을 느낀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만큼은 나라는 존재가 대체 가능하고 싶지 않다.
가끔 주위에서 책이나 SNS를 보다가 '이거 딱 너잖아!'라던가 '이거 너도 봤으면 좋겠어' 라며 사진이나 링크를 보내올 때가 있다. 그가 가장 먼저 나를 떠올렸을 그 순간,
내가 그의 감정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모든 시간 모든 상황에 만나기 적합한 사람보다 이럴 땐 꼭 만나고 싶어 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상대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 선명한 나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과도 나쁘지 않은 사람 말고,
어떤 기분만큼은 전부 차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