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함이 낭비되는 순간
"무단횡단을 하던 길에 쓰레기를 줍고 가는 아저씨를 보았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하다." 언젠가 웹툰 작가 주호민이 SNS에 남긴 글이 인상 깊어 스크린샷을 찍어 두었다. 환경 애호가가 그 관경을 본다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쓰레기를 줍는 투철한 환경 사랑에 감명받아 무단횡단쯤은 가볍게 보였을 수 있고 운전석에서 보았다면 창문을 열고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라고 소리 질렀을 수도 있다.
사람은 입체적이고 복잡하다. 심지어 사람을 판단하는 주체도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판단도 판단을 내리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 된다.
최근 에디터 출신 스타일리스트가 본인의 SNS에 특정 아이돌을 겨냥한 듯한 글을 공개했다. 네티즌은 저자의 의도대로 손쉽게 특정 인물을 아이린으로 지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속사와 아이린이 사실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발표하자 분노는 일파만파로 퍼졌다.
얼마 전 <놀면뭐하니>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환불원정대'라는 프로젝트 그룹이 결성되었다. 그 그룹은 네티즌의 댓글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들이 항의하면 어떤 매장에서도 저절로 물건을 환불해 줄 것 같은 즉, 센 언니 이미지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중들은 환불받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강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 같다. 환불 기준이 애매한 상황에서나, 책임이 불분명한 접촉사고가 난 순간 큰소리를 치면 유리해지는 상황이 우리에게 어색하지 않다. 자산을 침해받는 순간 우리는 지극히 예민해지고 강함이라는 가장 쉬운 무기를 선택하게 된다.
아이린이 아이돌의 최정상급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를 아무래도 외적인 모습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외모가 미디어에 더 예쁘게 나와야 대중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고 본인의 타이틀을 지켜낼 것이다. 아이린에게 미디어에 본인을 노출하는 순간은 우리가 환불받는 순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연예인이 그렇지 않지만 그는 지극히 예민해졌고 강함이라는 가장 쉬운 무기를 남발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 아이린은 약자고 대중들은 강자가 되었다. 강함을 낭비한 아이린을 헐뜯으며 우리의 강함을 낭비해도 되는가. 아이린의 좋은 면을 내세우며 갑질을 폭로한 스타일리스트 아픔에 추가적인 아픔을 가해도 되는 가.
이 두 물음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좋겠다. 내가 강함을 쉽게 선택하고 있진 않은지, 내가 들어낸 강함은 정당한지.
강함은 무엇일까. 황현산 선생님의 말씀을 빌려 생각해본다. 강자의 자리에 있지만 실은 약한 사람들. 잔인함은 그들에게서 나올 때가 많다. 세상에는 울면서 강하게 사는 자가 많다.
약한 사람에게 더 약해질 줄 아는 것은 굴종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 능력일뿐더러, 더 좋은 세계를 위한 연습일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