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영옥 Aug 11. 2024

꿈을 꾸기 까지

 어릴 때,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자신이 경험한 상황 안에서 아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부모님에 의해 듣게 된 것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선생님이었다. 엄마가 교대 가서 초등학교 선생님하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그것의 영향이었는지 딱히 다른  직업을 몰라서 이야기 했는지 그래도 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얘기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 한가지는 분명히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3,4학년 거쳐서 1년정도 피아노를 배웠다. 체르니 30까지 치고 40들어가기 전에 어려워서 그만둔 걸로 기억난다.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꿈을 피아니스트로 적으면서 약간 흥분되며 기뻤던 기억이 난다. 무언가 내가 배우고 있는 것의 꿈을 가졌다는 열망이 가슴 속 안에서 몽글몽글 일어났다. 하지만 더 이상 피아노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자, 다시 선생님으로 적었던 기억이다.
 
 약간 더 어렸을 적에 엄마가 숫기가 없다고 오빠와 나를 웅변학원에 보냈다. 그래도 꽤 다녔다. 오빠가 웅변대회에 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덩달아 열심히 웅변을 했다. "이 연사 외칩니다" 를 하며 앞으로 자신있게 손을 뻗으며 내 마음 속에 자신감이 조금 더 쌓였던 것 같다. 웅변학원을 부부 선생님 두 분이 운영하셨는데 자상하시고 좋으셨다. 남자 원장님의 가끔 과한 표현인 뽀뽀는 어린 나이 였지만 약간은 싫었던 느낌이다. 그래도 우리를 아뻐하셨기에 좋은 감정으로 남아 있다. 웅변학원에서 배웠던 힘은 초등학교를 지내는데 긍정적인 밑바탕이 되었다. 글쓰기도 배웠는데 그로 인해 독후감 및 글짓기로 몇 번 상을 탔었다. 잠깐 다녔던 주산학원은 얼마 못다니고 그만 두었다. 흥미와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지루했다.
 
 어릴 때 배웠던 경험들과 초, 중, 고 를 거치면 배운 학습들로 내가 가져야 할 꿈을 명확히 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니 약간 멋진 꿈을 꾸고 싶었다. 그래서 디자이너, 스튜어디스를 끄적여 보기도 하며 내 현실과 괴리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중학교 때 라디오를 많이 들으면서 중3때부터는 방송작가를 꿈꾸며 고등학교 2학년때 까지는 당당히 적었다. 특별한 나의 꿈이 멋져보였다. 고3때가 되니 다시 현실감을 느끼며 선생님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나의 꿈은 막연한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게 바뀌어져 갔다.

 어릴 때부터 수학에 항상 자신감이 없었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몰입과 노력으로 수학을 극복하면서 흥미를 느껴 문과에서 이과로 전환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수개념, 계산이 빠르지도 않은 내가 고등학교 수학 논리가 재미있었고 혹시나 계산에서 실수할까봐 2~3번 계산을 확인했다.
 대학교 수학까지는 많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수학과의 중심부 해석학 개론을 열심히 하고 입실론, 델타로  증명 과정을 이끌어내는 숙제에 최선을 다했다. 스터디 하며 배운 것도 많았고 이해하려고 최대한 노력했던 과목이다. 그 외에 과목은 그렇다 할 흥미가 없어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다. 사교육으로 수학을 가르쳤고 교육대학원에서 중등교사 2급자격증을 따고 기간제, 강사로 일했다.

 지금은 세 가지 흥미가 있다.
수학, 그림책, 글쓰기

 그래서 수학도 가르치고 글쓰기도 하고 시니어교육지도자로 시니어분들에게 그림책과 함께 놀이활동을 하려고 강사로 준비 중에 있다.

 매우 복합적으로 내가 나가고 싶은 길이 40대 초반에서야 분명해졌다.

 그동안 대학원까지 나왔는데 쓸모가 없다고 했던 말은 이젠 그만 둔다. 어릴 때부터 어제까지 내가 경험한 모든 일들이 나의 현재 꿈을 만든다. 또 미래에 나의 꿈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른다. 나의 앞으로 경험에 비추어 꿈은 방향성을 또 잡을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촌 놈 <집, 이야기를 품다> 공저가 세상에 나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