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이, 우리도 할 수 있다!
난 여행을 많이 다녔다. 유럽을 여섯 번, 일본은 여덟 번, 동남아 이곳저곳을 여러 번, 호주도 한 번 다녀오고, 아프리카 대륙은 두 번 여행했다. 이 여행들은 거의 대부분 나 혼자 떠났다. 결혼을 한 후에 아프리카를 한 번, 유럽을 한 번, 일본을 세 번, 동남아 이곳저곳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그 횟수로 보나 여행의 길이로 보나, 혼자 길 위에 있던 날들이 훨씬 많았다.
여행은 일이 되기도 했다. 여행작가라는 타이틀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매체에 글과 사진을 싣는 일을 10년은 해왔다. 누구나 다 아는 곳을 좀 더 아름답게 촬영하기도 했고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은밀하게 소개하기도 했다. 다만 그걸 온전한 여행이라 부르기는 민망한 일이었다. 가끔 넋을 놓고 풍경 속에 가만히 서 있던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가장 효율적인 루트를 미리 짜놓고 그곳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적의 사진들을 몇 컷 찍고 바로 이동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부작용이 생겼다. 더 이상 낯선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국내에서 유명하다는 곳은 거의 다 가버렸다. 유명해질만 한 곳도 많이 갔다. 혼자서. 평일에. 당연히 내가 이동할 때의 도로는 한적하고 원활했다. 앵글에 들어오는 사람들이야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외려 저 멋진 길로 사람이 지나가길 무작정 기다린 적도 적지 않았다. 결코 북적이지 않은 날들이었기에 나는 어디에서든 ‘사람대접’을 받았다. 일 때문이었으니 비록 그걸 온전한 여행이라 부르기엔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낯선 곳에 갈 때면 가장 홀가분하고 가장 효율적인 계획과 함께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아빠가 되었다. 아들의, 아니 두 아들들의 아빠가 되었다. 첫 아들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그럭저럭 버틸 만 하다는 내 오만은, 두 살 터울의 작은 녀석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은 제 형보다 더 예민했고 그래서 잠을 적게 잤으며 먹는 것에 그리 큰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엄마 외의 모든 사람에게 의심과 적대를 보이는가 하면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그래서, 작은 녀석이 기저귀를 뗄 때까지 나와 아내의 최대 목표는 ‘살아남기’였다. 여행은 감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저 먼 곳의 존재였다.
하지만 둘째가 그럭저럭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가자, 우리 부부는 슬슬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쨌든 이제는 걷잖아.”라는 이유로 작은 녀석을 데리고 여행을 가도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게다.
사실 먼 데까지 가는 일은 이미 몇 번이나 경험을 한 터였다. 녀석들의 친가와 외가가 우리가 살고 있는 통영과는 4시간 떨어진 서울과 산본에 있다 보니 장거리 여행은 두려운 선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행은 또 다른 얘기다. 특히 아들이 둘이나 있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아이가 하나였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큰 녀석 하나 데리고 제주도에서 3박을 할 때만 해도 “아이가 있는 가족의 여행은 이런 게 즐겁구나”라는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이 녀석이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스스로 호기심을 보이는 대상을 함께 바라보며 웃을 수도 있었다. 번갈아 가며 밥을 먹긴 했지만, 어른 둘이 아이 하나를 끼고 밥 먹는 일도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호텔 뷔페에서도 녀석은 제법 의젓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엄마 아빠가 오랜만에 느긋한 식사를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하지만 둘째까지 포함한 네 명의 가족이 함께하는 여행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큰 녀석과 작은 녀석은 서로 간의 유기적인 호흡으로 엄마 아빠를 지치게 하는 데에 시너지를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다.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는 일은 없었지만, 방향이 일치한다 해서 요구 역시 같았던 건 아니다.
짐도 많아졌다. 내가 혼자 한 겨울의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여행할 때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아졌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준비하는 일은 마치 세계3차대전을 대비해 피난 가방을 싸는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런 건 현지에서도 살 수 있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도 손으로 가방에 꾸역꾸역 밀어넣는 물품들이 몇 가지나 됐다. 없으면 불안해지고 막상 가지고 가면 그저 짐밖에 되지 않는 그 숱한 장난감들과 여벌 옷들과 이러저런한 약과 연고 같은 것들은, 마치 자기가 짐가방의 주인인양 당당히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짐을 모두 정리해놓고 나면 기운이 빠지고 여행에 대한 의욕은 급속히 사라지는 경우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볼까 하는, 그다지 실용적이지 않은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가 아니라 나 혼자서 말이다.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생각이라니! 이래서 남자들은 자신의 수명을 스스로 단축시킨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게 그저 종족적 특성에 기인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제 작은 녀석이 사람의 형상을 온전히 갖추고 사람 노릇을 하기 시작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물론 엄마도 함께하면 좋겠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 엄마보다는 일이 없으면 백수가 되는 아빠 쪽이 시간적 여유가 많다. 무엇보다 아빠는 엄마보다 오랜 시간 운전을 해도 별로 피곤해 하질 않는 데다가 이미 혼자 가본 데가 많아 여행 후보지를 고르는 데에 좀 더 폭 넓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물론 아이들이 그곳을 좋아하는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녀석들을 핑계삼아 나 역시 집을 떠날 수 있어서다. 물론 여전히 혼자 돌아다니며 촬영을 하고 취재를 하는 일은 적지 않지만, 일 때문에 집을 나서는 건 당연히 일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멀리 가고 싶어지는 때에 아이들에게는 여행을, 엄마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떠나는 의미는 적지 않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는, 이 두 아들놈들이 아빠와 살갑게 지낼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 나 역시 우리 아버지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아직 아빠의 손을 잡는 게 어색하지 않을 동안이라도 이 녀석들과의 시간을 많이 쌓아두고 싶다. 아직 초딩도 안 된 큰 녀석은 벌써부터 나와 데면데면 해지는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버지. 내 아버지는 여행을 싫어하시는 분이다. ‘별로 안 좋아한다’ ‘흥미없다’ 수준이 아니라 ‘난 멀리 가는 거 싫다’라고 딱 잘라 말씀하실 정도다. 그런 사실을, 나는 어디든 혼자 가도 괜찮은 고등학생 무렵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날 데리고 어디든 다니셨으니까. 자가용이 있는 집이 아니었던 터라 친목회 등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는 여행에, 아버지는 어머니나 동생을 제외하고 오직 나만 데리고 가셨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가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내 또래는 별로 없는 그런 여행이 좋았냐고? 좋았다. 어쨌든 ‘처음 가는 데’에 가는 게 좋았다. 아저씨들 틈에서 넙죽넙죽 삼겹살을 받아먹고는, 돌아오는 길에 온천에 들러 몸을 ‘지지는’ 것도 좋았다. 역마살을 타고나 그랬는지 몰라도, 어쨌든 나는 어디든 멀리 가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아버지 눈에는 참 기특하고 좋아보였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 부부의 아들들이 돌아다니는 걸 썩 내켜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이 녀석들의 의사표현이라는 게 아직까지 섬세하고 완벽한 건 아니라서. 하지만 지금까지는 다행스럽게도, 이 녀석들 역시 여행을 좋아한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니 이제 해야 할 일은, 나 혼자 성격이 전혀 다른 두 아들을 데리고 모두 즐거운 하루 혹은 이틀 아니면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자, 우선은 가까운 곳부터 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