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도시, 오덴세_01
1996년 8월 어느 날, 자정이 안 돼 오슬로를 출발한 열차를 타고 베르겐에 도착했던 나는 그곳에서 이틀인가를 보내고 다시 오슬로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는 진행방향의 오른편에 앉아 있었는데, 베르겐을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앉은 창가 쪽으로 호수 하나가 나타났다.
노르웨이, 아니 스칸디나비아는 워낙에 호수가 많은 곳이다. 특히 기차를 타고 가면 크고 작은 호수들을 숱하게 볼 수 있기에, 그때의 내게는 특별할 것도 없는 풍경이었을 게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난 보스의 호수를 보자마자 다시 배낭을 집어 들고 기차에서 내렸다. 마침 호숫가에 유스호스텔이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역에서부터 유스호스텔까지는 약 1km 남짓. 길은 호수를 따라 이어져 있었고, 그 길을 걷는 건 나 혼자였다. 십 분 정도 걸어 도착한 유스호스텔에는 마침 자리가 있었다. 요즘처럼 예약이 필수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던 터라 나는 호수와 접해 있는 그 호스텔에서 이틀을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내가 했던 것은 그저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거나, 같은 방을 쓰는 다른 여행객들과 이런저런 여행 이야기를 하거나, 마을에 가 저녁에 해먹을 부식을 사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면 호숫가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빈둥거렸다. 천국 같은 나날이었다. 내게 스칸디나비아의 이미지를 가장 강렬하게 심어준 곳이기도 했다. 그 첫 방문 이후 노르웨이에 갈 때마다, 나는 보스에서 여러 밤을 보냈다. 그리고, 보스의 겨울은 어떨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이 글의 서두에 썼던 것처럼, 내가 스칸디나비아를 굳이 겨울에 여행하게 된 것은, ‘진짜 겨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스칸디나비아의 여름은 백야 현상 때문에 모든 곳이 오랫동안 밝게 빛나고 거리의 사람들도 활기차며 많은 경우에 대해 낙천적 예상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겨울은 어떨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보스의 유스호스텔에 전화를 걸었던 게 1월 3일 혹은 4일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다행히 그곳은 영업을 한다고 했다. 여행객이 전무하다시피한 계절이라 굳이 예약이 필요는 없었지만, 기왕 전화를 건 김에 내 이름을 불러주고 묵을 날짜를 말해주었다. 공중전화를 끊고 열차 시간을 확인한 후 역을 빠져나오자 주위는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온통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여름에는 그 어느 곳보다 동화처럼 아름답고 유쾌한 도시 오덴세가, 겨울이 되자 온통 차가운 습기에 갇혀 버렸다.
오덴세라는 말은 북유럽 신화에서의 왕, 이제는 토르의 아버지로 더 유명해진 ‘오딘’에서 비롯되었는데, 동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데르센의 고향이기도 하다. 다행히 전쟁의 신과 계약의 신인 오딘보다는 안데르센의 영향이 더 컸던 덕분이지, 이곳의 여름은 아늑하고 신선했으며 평화로웠다. 기린 무늬를 한 높다란 굴뚝이 보이는 공원에서 햇볕을 맞으며 잔디에 앉아, 냇가를 오르내리는 오리 가족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잘도 흐르던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눈과 안개로 말미암은 침묵으로 가득 차버린 것이다. 나는 그 풍경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