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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16. 2018

아빠의 여행_03

작은 녀석이 쏘아올린 '그것'

아빠, 호두(작은 녀석의 태명이자 별명)가 토해!”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은 큰 녀석이 내게 급히 알람을 울렸다. 하지만 녀석이 알려주기 전에 이미 나는 작은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우웩,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녀석의 울음소리가 들렸으며 시큼한 토사물 냄새가 차를 가득 채웠다. 그 일련의 과정을 본 후 큰 녀석은 내게 보고를 한 것이다. 우리는 왕복 4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으며 목적지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목적지는 바닷가의 한 중국집. 예전에 함께 회사생활을 했던 동료를 만나 점심을 함께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이 성사되기 1km 직전에 작은 녀석이 토를 했던 것이다. 아내와 함께였다면 그나마 나았을 테지만, 통영에 있는 아내 생각을 해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사실을 열심히 되뇌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차를 세우는 것이었다. 제주에서 첫 일정을 끝낸 후의 사태였다.

     

한적한 골목 초입 부근에 차를 세우고 뒷자리로 가보니, 속을 게워낸 작은 녀석은 의외로 덤덤한 표정이었다. 물론 티셔츠와 카시트는 토사물로 젖어버렸지만, 속이 편해져 그런가 싶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자매국수에서 아침을 먹을 때부터 작은 녀석은 별로 의욕이 없었다. 애초에 입이 짧은 녀석이라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게 잘못인가 싶었다.

이후 도착했던 아침미소목장에서도 점퍼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세상만사 다 귀찮은 60대 아저씨의 표정을 짓고 있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아내가 있었으면, 아이들의 엄마가 있었으면 나보다는 더 예민하게 그런 사인들을 알아차리고 미리미리 예방을 했을까 싶기도 했다. 나 혼자 뿐이라는 게 짜증이 나면서도 녀석들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내가 이 녀석들이 체력을 과대평가 했나 후회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의 잠을 깨우는 데에 비행기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제주에 도착했던 것은 오전 830. 김해에서 출발한 게 오전 730. 공항에는 오전 630분에 도착했으며 집에서 출발했던 것은 새벽 5시 무렵이었다. 아직 깜깜한 밤이었으며 녀석들은 비몽사몽인 상태였다. 주차대행 업체를 거쳐 공항에 도착했을 때도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다 비행기를 보고서야 비로써 여행을 실감했던 녀석들은, 비행 중에만 잠시 신이 났을 뿐이었다.


카메라를 들이대자 잠시 신난 모습을 보여줬던 형제.


렌트카를 인수하고 카시트 대여소에서 카시트를 장착한 후 고기국수를 먹을 때에도 녀석들은 여전히 잠이 완전히 깨질 않았다. 국수도 고기도 먹는둥 마는둥이었다. 아침미소목장에 도착했을 때도,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이었는지 녀석들은 그닥 즐거운 얼굴은 아니었다. 목장의 카페에서 우유를 한 통 구입한 후 그것을 송아지에게 물리자 그제야 큰 녀석은 신이 났다. 하지만 작은 녀석은 송아지가 무섭다며 뒷걸음질만 쳤다. 그리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내내 못마땅한 표정인 채였다. 포토존에서 사진을 한 장 찍자 해도 끝까기 거부를 하는가 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예 뒤돌아 서 있기도 했다.


이때부터 작은 녀석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큰 녀석은 동물에게도 제법 용감하게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형과 함께 사진을 찍자는 말에도 도리질만 하던 작은 녀석.


이 표정이 모든 사태의 전조였음을 그때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래서 입장료는 무료지만 한 번 들어가면 돈을 안 쓸 수가 없어요라는 후기가 대세를 이루는 그곳에서 나는, 고작 3,000원짜리 송아지용 우유 한 병을 구입한 것 외에는 어떤 추가 지출도 없었다. 끝없이 내리던 는개 때문이기도 했지만, 맘에 안 드는 곳에 더 있어봤자 추후 일정에 지장을 줄 게 뻔했기에 빠른 포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 일정인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하던 중에 일이, 그러니까 구토가 터진 것이다.

     

제주에서의 첫 날, 내게 주어진 가장 큰 미션은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곳을 찾아가거나 예쁜 사진을 찍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게 아니라, 작은 녀석의 내적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내는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들의 혹은 제주의 풍경을 찍은 사진 따위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


나는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옛 동료를 만나기 위해 가게로 뛰어들어갔다. 나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그를 향해 "미안한데, 나 지금 점심 못 먹어. 작은 애가 오는 길에 토를 했어."라고 빠르게 상황을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그 역시 30개월 된 아들을 키우고 있는 터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세 알아듣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동하자 했고 나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집 앞에 도착한 후에는 트렁크에서 작은 녀석이 갈아입을 옷을 꺼내 겨드랑이에 끼고 양손에 아이들의 손을 잡고는 옛 동료의 안내를 받아 얼른 욕실로 향했다. 비누칠을 하지 않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 후에야 나는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제 동생을 데리고 욕실에서 나오는 걸 본 큰 녀석은, 그제야 안심이 됐는지 집안을 둘러보더니 금세 장난감들을 찾아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장난감이 많던 그 집은, 녀석들에게 작은 키즈 카페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나와 옛 동료 모두 한숨을 돌렸다. 어쨌든 급한 상황은 수습이 됐다고 생각했으니까. 그제야 오후 두 시가 될 무렵이건만 점심을 먹지 못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까 그 중국집에 탕수육과 볶음밥을 시킨 후에야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주 잠시 동안, 곧 무슨 일이 또 터질지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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