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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Sep 20. 2018

아빠의 여행_04

머나먼 숙소로 가는 길

     

오래 기다리지 않아 탕수육과 볶음밥이 도착했다작은 녀석이 먹을 건 없었다지금 막 속에 있는 걸 모두 끌어올렸던 녀석이 무얼 먹을 수 있겠는가나와 옛 동료그리고 큰 녀석만 셋이 식탁에 모여 앉자 작은 녀석이 나도 먹고 싶은데라며 울먹였다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막상 직접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속이 상했다

안 돼너 배 아프잖아이거 먹으면 더 아파져.”

이 얘기에 쉽게 수긍을 하면 그게 아이겠는가녀석은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집에 있는 밥을 끓여 미음이라도 만들어주면 어떻겠냐는 말도 그냥 사양했다얼른 먹고 숙소로 들어가는 편이 여러 모로 낫겠다 싶었던 탓이다

     

아무튼먹어야 하는 사람들은 먹어야겠기에 열심히 포장을 뜯고 이제 막 탕수육을 하나 집어먹으려는데작은 녀석이 다시 나를 불렀다

아빠응가하고 싶어.”

작은 녀석은 용케도 그 집 아이가 쓰는 변기를 발견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나무젓가락을 내려놓고 얼른 달려가 녀석의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앉혔다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배가 고팠을 큰 녀석은 볶음밥을 열심히 먹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아니나 다를까물티슈로 닦아주고 손을 씻은 후 다시 자리에 앉아서 보니 큰 녀석 몫으로 덜어놨던 볶음밥은 반이나 없어졌다

     

큰 녀석은 자기에게 주어진 밥을 빠르게 먹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다시 장난감들을 갖고 놀기 시작했다작은 녀석도 돌아온 형 덕분에 별 소리 없이 함께 놀았다우리는 그제야 끊겼던 얘기들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다한 명은 부천에서 제주로한 명은 서울에서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지 7, 8년이 되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는가하지만

아빠나 또 응가하고 싶어.”

라는 작은 녀석의 칭얼거림에 나는 다시 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두 번째 뒤처리를 하고 나니 정말 전신의 힘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애 설사똥 닦아주려고 제주까지 왔던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몇 년 만에 만나는 사람 집에 갑자기 쳐들어와 무슨 민폐를 끼치는 건가 괴롭기도 했다이러다 혹시 이 집 아이한테 장염이라도 옮으면 어쩌나 싶어 겁도 났다집주인은 괜찮다며 나를 위로했지만내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지를 수가 없었다배가 고프긴 했지만 더 이상 뭔가를 먹을 맘은 사라졌다더 먹으라는 권유에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때작은 녀석이 울기 시작했다하고 돌아보니 바지에 응가를 했다는 거였다아이고야이번엔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동료도 일어섰다자신이 물로 씻기고 옷을 벗기고 있을 테니 차에 가서 갈아입힐 옷을 가져 오라 했다나는 얼른 현관을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이 녀석도 고생이구나나도 고생이고큰 녀석은 그럭저럭 살만 하지만어쨌든 삼부자를 한 묶음으로 놓고 보자면 결코 행복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스럽게도작은 녀석은 그 사고’ 이후 더 이상의 분출(!)은 없었다하지만 내게는 남은 일이 있었다수습을 도와준 옛 동료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다시 카시트 대여 업체로 향했다조천에서 제주 시내까지 가는 길이었으니 그리 짧지가 않았다그 동안 작은 녀석은 젖은 카시트 대신 차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야 했다그리고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형이 앉아 있는 카시트에 기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사고뭉치인 작은 녀석인 태어난 이후 가장 안쓰러워 보였던 순간이었다.

     

카시트를 교환하고 드디어 숙소로 출발하기 전에서귀포에 있는 죽 전문점에 전화를 해 포장을 부탁했다지금 바로 조리해 포장해 두어달라고 했다그래야 그 사이에 죽이 식어 숙소에 가면 아이들이 바로 먹을 수 있을 테니까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모두 지친 상태였고하늘은 여전히 흐렸다서귀포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는 내비게이션의 표시를 보고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얼른 오늘 하루가 끝나길 바라는 마음만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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