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호캉스
제주에서의 두 번째 날.
비는 참 많이도 내렸다. 예보를 보고 도착했던 터라 맘의 준비는 되어 있었지만, 막상 내리는 비를 보고 있노라니 맘이 산뜻할 수는 없었다. 물론 혼자였다면 비가 와도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방수가 되는 외투를 입고 숲길을 걷거나 해안도로를 따라 무작정 달리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우고 한없이 바다만 바라봐도 좋았을 것이다. 제주에 널린 게 카페고 그곳들은 비오는 날 그 효용이 더 높아지니 비가 온다고 해서 안 좋을 게 뭐 있겠는가. 혼자라면 말이다.
노르웨이의 작은 마을 보스(Voss)에서 나는 혼자였다. 1월 3일부터 2박 3일 혹은 3박 4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름이면 기분 좋게 북적이는 호스텔이지만, 그때의 숙박객은 나 혼자였다. 호스텔의 앞마당과 맞닿아 있는 호수는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네 번째 방문이었고, 그때는 일부러 겨울에 거길 갔다. 그 맑고 차가운 호수를 걸어서 건너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오랜 꿈이기도 했다.
보스에 도착한 다음 날엔 비가 내렸다. 1월 노르웨이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나는 그 풍경이 좋았다. 나무틀로 짜인 창문에 조용히 맺히는 빗방울을 보고 있는 게 좋았다. 그 빗방울들 너머로 호수 위의 눈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나 혼자 사용하던 4인실은 내 오랜 여행의 흔적들로 너저분했지만, 그것 역시 좋았다.
조금 어두웠고 습했으며, 적막했고 외로웠기에 나는 그때가 내 스칸디나비아 여행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제주에서는 장염에 걸린 아들 하나와 심심하다며 뒹굴거리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둘에게 우선 약부터 먹어야 했다. 호텔로 오는 길에 들렀던 소아과에서 처방해준 약은, 이상하게 흙색이었다. 현무암색이 비쳤던 터라 “이건 제주의 또 다른 상징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함께 간 김에 처방받은 큰 녀석의 시럽 형태 감기약 역시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이었다.
작은 녀석은 그런 약을 공복에 먹어야 했지만, 쉽게 입을 벌리지 않았다. 버티는 녀석을 구슬리기 위해 “이거 먹고 나면 먹고 싶은 거 사줄게”했더니 죽을 먹고 싶다 했다. 큰 녀석도 죽을 먹고 싶다 했다. 제주에서의 첫 아침 식사는 그렇게 죽으로 결정됐다. 해녀의 집에서 만드는 전복죽이 아니라 호텔 로비에 있는 편의점에서 파는 포장죽. 그거라도 먹겠다 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제주에서의 둘째 날은 그렇게 인스턴트 음식으로 시작되었다. 호텔을 출발해 도착한 곳은 키즈 카페였으며, 점심은 프랜차이즈 김밥집에서 포장한 김밥이 전부였다. 제주가 아니라 전국 어디서든 가능한 일정이긴 했지만, 내게는 그래도 다행인 반나절이었다. 더 이상 작은 녀석이 아프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으니까.
오후에는 내내 호텔방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내 전화기로 동영상을 보거나 갖고 갔던 『수박 수영장』과 『할머니의 여름 휴가』를 읽어주었다. 두 권의 그림책을 읽으며, 우리가 있던 방이 작은 해수욕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잠깐 했다.
그러면 이 녀석들은 하고 싶은 대로 모래장난을 할 테고, 나는 잠시나마 물에 둥둥 떠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눈치를 보며 하이볼도 한 잔 마실 수 있을 테고. 하이볼을 마시고 혼자 휘파람을 불다 보면 탄자니아에서 봤던 그 뜨겁도록 황홀했던 석양을 다시 만날지도 몰라. 갑자기 하이볼이 어디서 났느냐고? 그게 무슨 상관이야. 호텔방이 해수욕장이 되는데, 삼다수가 하이볼이 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 지금 우리는 여행을 온 거니까. 처음으로 삼부자만의 여행을 온 거니까, 그런 상상 같은 거 해도 괜찮잖아. 어제는 많이 힘들었고, 오늘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야 연착된 비행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한 아내에게는,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