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서울여행
아내와 연애할 때 이후 약 10년 만에 도착한 롯데월드. 어트랙션 자체는 크게 달라진 바가 없지만 입장권을 구입할 때부터 줄을 서야 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어젯밤 시뮬레이팅 했던 할인 혜택 중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 있을 줄도 몰랐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 능숙한 직원의 현란한 조합 덕분에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할인율을 적용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순식간에 ‘어리버리 아빠’가 된 나의 비애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녀석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입장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다. 물론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아빠가 대수인가. 바로 앞에 유튜브로만 보던 꿈과 환상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내 들어선 롯데월드에서 우리가 첫 행선지로 정한 곳은, 신밧드의 모험이었다. 보트에 타고 첫 경사를 내려가는 것만으로도 퀴퀴한 물비린내 속에 갇히게 되는 신밧드의 모험은, 내게 롯데월드의 이미지를 심어준 가장 상징적인 어트랙션. 그 넓고 깊은 테마파크의 심연까지 들어갔다 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롯데월드에 들어서면 통과의례처럼 가장 첫 순서로 탑승하곤 했다. 다행히 아이들도 그 고색창연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나 역시 향수를 느낄 수 있어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다만, 내가 초등학생 때 보았던 그 엉성한 홀로그램 영상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게 경악스러웠지만.
평소엔 잘 걷지 않으려던 아이들이 “이번엔 저거 타러 갈까?”라는 주문에 홀린 듯 쉬지 않고 움직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타고 싶은 걸 다 탈 수는 없었다.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신장이 롯데월드에서 요구하는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쉬운 건 나였다. 나 역시 오랜만에 찾은 놀이동산에서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을 타며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맘이 결코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애 시절 아내와 함께 왔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겨울이었고 평일이었으며, 무엇보다 우리 둘 다 체력이 좋았다. 덕분에 이것저것 원하는 만큼 타면서 비명과 환호도 거침이 없었다. 회전바구니를 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탑승자의 완력으로 회전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회전바구니는, 남자들 특히 남자 고등학생들이 놀이공원에 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만 아내는 내게 그런 추억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나는 아내가 회전운동에 약하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엄마가 화장실 가서 토했어?”
잠시 쉬기 위해 음료수를 마시던 작은 녀석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물었다. 롯데월드로의 계획을 세웠을 때 아내가 아이들에게 당시의 엄마가 회전바구니를 타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세세히 이야기해준 걸, 작은 녀석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토했지.”
괜히 떠오르는 미소를 지우기 위해 콜라를 마시며 대답했다. 아이들은 서로의 표정을 숨기지 않고, 마주 보며 웃었다. 웃다가 “우웩 우웩” 소리까지 내며 엄마가 토하는 모습을 흉내 내기도 했다. 그때의 엄마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회전 감수성이 약한 녀석들의 버릇을 바로잡아줘야 했다. 그래서 회전바구니에 태웠다. 물론 그때만큼 빨리 돌리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을뿐더러 혼자 있을 때 아이들의 토사물을 치우는 경험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딱 즐거운 만큼만 회전을 하다 나온 아이들은, 이번엔 매직 아일랜드로 나가자 했다. 이미 유튜브를 통해 가고 싶은 곳을 예습했던 터였다. “공부를 그런 정성으로 좀 해 봐라”라는 말을 하기엔 이른 시기였지만, 그 문장의 사용법에 대해서는 확실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모노레일을 타러 가야 한다며 나를 졸랐다.
옛날엔 모노레일이 실내외 한 바퀴를 돌았던 것 같은데, 라는 기억을 되살리기도 전에 우리는 내려야 했다. 모노레일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느껴지는 것은 무서운 열기였다. 그래, 여름이지. 통영보다 더운 서울의 여름이지. 그래도 아이들은 별 상관이 없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저만치 달려가는 아이들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그리고 또 몇 개의 어트랙션을 타기 위해 줄을 서야 했다. 뙤약볕 아래서.
상대적으로 대기가 짧은 어트랙션 몇 개를 즐긴 후 혜성특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래, 지금이 한 번 먹어줄 타이밍이긴 해. 그런데… 그런데 아이스크림 가게가 어딨지? 줄은 얼마나 남았지? 실내에서는 먹다 흘린 거 씻어내기가 쉽지가 않을 텐데. 그래도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니까 좀 더 빨리 먹을 수 있겠지? 아이들 얼굴이 빨간 게 유난히 눈에 와 박혔다.
나중에 아내에게 “타고 나와서 사줘도 됐을 텐데 왜 그랬어?”라는 타박을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건 몰라도, 무언가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움직이는 게 아빠들인데. 진화생물학이나 문화인류학을 제대로 배운 경험이 없는 평범한 아빠의 추론으로는, 어쩌면 많은 남자들이 갖고 있는 동물적 조건반사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오랫동안 수렵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해오는 것이 집단에서의 남자들에게 주어진 임무였을뿐더러, 생존(!)과 관련된 요청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부모의 본능이니까.
두 녀석 모두에게 “줄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이스크림을 찾아 나섰다. 감히 지엄한 아이스크림을 더러운 것에 빗대는 것이 불경하기 이를 데 없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니 없다는 말이 그때처럼 절실하게 와닿던 때도 또 없었다. 그렇게 많아 보이던 아이스크림 가판대들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귀한 개똥, 아니 아이스크림을 들고 잘도 돌아다녔다. 답답한 마음에 더위가 더욱 사무치게 괴로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기만 보고 없으면 포기하자”고 마음먹은 곳에서 아이스크림 가판대를 발견했다.
아이들이 서 있는 줄은 보이질 않는 곳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판매원이 “기계가 고장 나 아이스크림이 반쯤 녹아 있는 상태라 판매가 힘들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 설명에 한숨이 나왔다. 아이스크림의 존재 이유를 모르고 있는 아이스크림 판매원이라니. 이 세상의 아이스크림 단 두 종류다. 녹지 않은 것과 녹아버린 것. 그리고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녹지 않은 것을 녹이는 행위다. 그래서, 반쯤 녹아 있는 상태라면 더 빠르게 녹아버린 것이 될 수 있다. 빨리 먹이고 빨리 처리해야 하는 내게는 그보다 더 좋은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힘주어 “괜찮다”고 하며 신용카드를 건넸다. 아이스크림 판매원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벌써부터 뚝뚝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콘 두 개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아이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러는 사이 아이스크림이 출렁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것들을 돌아보느니 한 걸음이라도 빨리 가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에게 도착했을 때, 나는 쪼그려 앉으며 아이들에게 다급하게 규칙을 설명했다.
“아이스크림 잡지 마! 아이스크림 방향을 바꾸고 싶으면 아빠 팔목만 잡아. 절대 손에 묻히지 마! 옷에 흘리면 안 돼! 고개를 더 앞으로! 입에 너무 많이 묻히지 말고!”
아이들은 내 양손에 고개를 박고 아이스크림을 먹기 시작했다. 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부럽지 않게 땀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내 앞뒤에 서 있던 엄마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놀라움도 있었지만 걱정이 더 많았다. “어머 어머, 저 아빠 손은 어떻게 해”라는 걱정 어린 목소리가 아이스크림 방울에 맺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도 그게 걱정이었다. 그 사이 줄은 한 차례 출렁이며 입구 쪽으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게걸음을 하면서 아이스크림에서 입을 떼지 않았고 나도 옆으로 걷는 오리처럼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됐다.
아이스크림은 아직 1/3 정도 남아 있는 상태. 사라진 2/3의 아이스크림 중 2/3는 아이들의 입 속으로, 나머지 1/3은 내 손에 고여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기 전에 그것들을 씻어내야 했다. “자, 여기까지만 먹어! 아빠 화장실 다녀올게.” 나는 아이스크림이 된 손 두 개를 앞으로 내밀고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그러는 와중에 80% 정도 액체가 된 아이스크림과 잔뜩 젖어 있는 콘을 흡입했다. 중간에 쓰레기통을 거쳐 갈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나 역시 적잖게 목이 마르고 더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장실에 도착했을 때, 내 손에 ‘건더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다시 뛰어 도착한 줄은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에어컨의 은혜가 미치는 실내 초입까지 들어가 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혜성특급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롯데월드에서 뭘 더 타고 뭘 더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무사히 귀가를 했으니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그때의 “아이스크림 런”은 내 인생에 있어 손에 꼽을 만큼 급박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기에,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당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도, 느긋하게 즐기는 한 개의 초콜릿 아이스크림이 절실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