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엄마친구네집 여행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게 다른 지역 출신 친구들이 생긴 건, 대학에 입학한 이후부터였다. ‘뺑뺑이’로 배정받은 학교가 아닌, 가고 싶은 혹은 갈 수 있는 학교를 선택한 또래와 만나는 건 상당히 흥미진진한 일이었다. 90년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음에도 “난 학교 끝나면 소 끌고 뒷산 가서 풀 먹이면서 공부했어야”라고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던 친구도 있었으니까. 물론 이런 경험은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내 역시 다양한 환경과 배경 속에서 자란 누군가를 새로 만났고 그 중 몇몇과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충남에 살고 있는 한 친구도 그런 몇몇 중 한 명이었다.
서로의 결혼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두 친구는 결혼 후에도 종종 왕래를 했고, 우리 부부가 통영으로 이사를 한 뒤에도 몇 번을 만났다. 물론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사람처럼 굴 때까지는 다 함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쪽 집안에서 가장 어린 우리 집 작은 녀석이 제법 걷기 시작할 무렵 아내의 친구로부터 초청이 왔다. 연말을 맞이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이자는 거였다. 반갑고 고마운 초대에 우리는 기꺼이 짐을 쌌다. 일정은 2박 3일. 아이들에게는 첫, 그리고 내게는 오랜만인 충남으로의 일정이었다.
아내의 친구집에 모인 가족은 모두 세 팀. 모두 같은 대학을 같은 해에 입학한 여자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다. 다시 말해 가족동반 동기모임이었던 셈.(다만 서울에서 온 친구는 남편 없이 아이와 둘이 참가했다) 우리는 통영에서부터 큰 대구를 한 마리 가지고 갔다. 아내는 그것으로 여러 명이 먹을 탕을 끓였고, 모두가 오랜만에 함께한 저녁은 여러 이야기들로 가득 찼다. 내일의 일정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가 나왔지만, 호스트 부부가 모두 그 지역 토박이들인 터라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첫 일정지로 삼은 공룡박물관이 어떤 곳일지 궁금해 검색을 해본 게 다였다.
그렇게 시작된 본격적인 충남 해안 도시에서의 이튿날은,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뭐 그다지 큰일은 아니었다. 아이들이 많은 일행이었던 터라 계획보다 좀 많이 늦게 출발하게 됐고, 그래서 바깥으로 나서자마자 점심부터 먹었던 게 색달랐다. 그 후에 방문했던 태안 쥬라기박물관은, 우리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고성 공룡박물관과 큰 차별점이 보이질 않았지만, 자연광이 꽤 많이 들어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박물관에서 나온 후부터의 일정은 꽤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다.
나는 피자가 먹고 싶었다. 단지 피자가 먹고 싶었을 뿐이다. 게다가 동행하고 있던 5명의 어린이들도 피자를 좋아했다. 이제 갓 17개월이 된 우리 집 작은 녀석은 머잖아 틀림없이 피자를 좋아할 예정이었다. 유아기를 지나 어린이가 될 테니까. 피자집은 엄마들에게 얼마나 안락한 장소인가. 배달 주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니 매장은 여유공간도 넉넉할 뿐 아니라, 대부분이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식기들도 부산스러운 나이의 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있는 일행에게는 어쩐지 안심이 되는 부분. 난 그런 곳에서 피자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피자집을 목적지로 삼았다. 고맙게도, 당시 한 명밖에 없던 ‘외부인’에 대한 예우도 포함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때 어른들 중 남자는 나 한 명밖에 없었을뿐더러 같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도 나밖에 없었다. 나는 희귀한 존재였고 그래서 저녁 메뉴 선택권 정도의 배려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암묵적 합의가 엄마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는 뜻. 물론 아내에게 확인한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큰 이견 없이 피자집에서의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당분간 피자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즈음, 우리를 초대한 아내의 친구가 그의 남편과 전화를 하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굉장히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가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당장의 만족감 때문에 아무런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묻어가는 일행”이 되는 게 이래서 좋네, 라는 생각에 괜히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가게 밖으로 나서자 예상과는 다른 곳으로 향하게 됐다.
삽교호 놀이동산. 잠깐 잠깐. 여기는 어디지? 주차장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설 때부터 나는 약간의 혼돈에 휩싸였다. 남편과의 통화 후 마뜩잖은 표정으로 내게 목적지를 알려주던 아내의 친구는, 우리 가족보다 먼저 도착해 그의 남편과 함께 서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착한 나는, 정말 오랜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출장을 많이 다니다 보니, 어디를 가든 한 번은 본 것 같은 풍경이라는 생각에 심드렁하기 마련인 내게도 너무나 생경한 모습들이었다.
높아 봤자 3, 4층 정도인 수십 개의 건물들은 어디 하나 비슷한 데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커다랗게 매달려 있는 간판들은 글자만 다를 뿐 모두 바닷가 유원지에서 쉽게 볼 법한 업종을 광고하고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계절 을씨년스러운 시간대였던 터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는 불빛들은 더 공허해 보였다. 아이들에게 그런 공간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 겨울바람이 꽤 차가웠지만, 아이들은 재빨리 흩어지려 했고 엄마들은 그런 아이들의 손이나 뒷덜미를 낚아채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저희 동네 오셨으면 여기도 한 번 둘러보셔야죠.” 이제 막 퇴근해 기다리고 있었다는 아내 친구의 남편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고, 그 옆의 아내 친구는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으로 “여길 꼭 와야 한대”라며 아내를 향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부부는 중고등학생 때도 알고 지내던 터라, 지금도 그때의 티격태격이 남아 있다는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남편의 말처럼 그곳은 꼭 와야 할만 한 곳이었다. 삽교호가 아니면 어디도 삽교호 같은 풍경을 만날 수 없었으니까.
여행을 업으로 삼은 나는, 가장 가치 있는 여행지가 어디냐는 질문에 “거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경험이 있는 곳”이라 답한다. 여행은 그런 거라 생각한다. 전혀 새로운 환경을 통해 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물리적 확인이 가능한 행위. 그리고 그 수 많은 횟집과 조개구이집을 굽어보는 관람차가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은 전국에서 삽교호가 유일하다. 해산물로 저녁을 먹고 실제 작전에 투입되던 전함의 실내를 돌아볼 수 있는 곳도 삽교호가 유일하다. 여행지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이만큼이나 갖고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삽교호가 참 신기했다.
우리 집 큰 녀석에게는 신기한 게 따로 있었다. 주위의 모습이 어찌 됐든, 녀석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눈이었다. 땅 위에 얇게 쌓여 있는, 채 1cm 두께도 되지 않을 눈. 큰 녀석이 그렇게 많은 눈을 직접 본 건 태어난 이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형들과 아직 의사표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작은 녀석이 전함 안으로 향할 때도, 큰 녀석은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눈밭을 찾아 벌렁 드러누웠다.
나와 아내는 녀석이 자빠진 줄 알고 “왜? 왜 그래 왜?”라고 소리를 치며 녀석에게 달려갔지만, 정작 누워 있는 녀석의 얼굴에는 웃음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한 눈으로 나와 아내를 번갈아 보며 사지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천사 모양을 만들었다. 아마 유튜브에서 봤던 것이리라. 나와 아내는 입을 벌리고 잠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을 목격한 건 비단 우리 부부뿐만은 아니었다.
앞서 가던, 그래서 다리를 건너 이제 막 배 안으로 들어서려던 아내의 친구들과 그 아이들도 눈 위에 누워 있는 큰 녀석과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엄마들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라고 걱정스레 물었고 아이들은 “쟤 왜 저래?”라며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대전 이북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4, 5년에 한 번 눈발이 휘날리는 곳에서 태어난, 그래서 난생 처음 진짜 눈을 본 만 3세 어린이에게 삽교호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로운 장소였을지 몰랐을 것이다.
아내는 곧 큰 녀석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외투와 바지에 묻어 있는 눈보다 걱정되던 건, 이 녀석의 옷이 너무 얇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 부부 모두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이들을 키우느라 몇 년 동안 추운 계절을 통영에서만 보내다 보니 윗동네의 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감을 잃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큰 녀석은 제 몸에 묻은 눈마저 신기하고 소중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우리 부부는 그 표정에 이상한 안쓰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의 그 순간은, 훗날 우리 가족이 겨울마다 눈을 보러 여행을 떠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커다란 배를 돌아보고 나오자 제법 어둑해졌다. 아내 친구의 집으로 돌아가 마지막 날을 마무리할 줄 알았지만, 우리는 다시 식당을 목적지로 정했다. 이 역시 아내 친구 남편의 배려(?) 덕분이었다. 주차장에서 “좀 이따 댁에서 뵙겠습니다”라고 내가 인사를 건네자 너무나 겸연쩍은 얼굴로 “아니, 여기까지 오셨는데 마지막 식사로 피자를 드시면 어떡합니까. 저 사람이 잘 모시지를 못 해서…”라며 내 아내의 친구이자 자신의 배우자를 잠깐 원망스러운 눈으로 돌아봤다.
난 그저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었을 뿐이지만, 그런 내 욕심이 한 부부의 불화를 야기한 것 같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사양할 수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된 터라 또 한 번의, 아니 제대로 된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낯선 또래들과 만나 한창 신이 난 아이들이야 어디를 가든 별무상관. 아내 역시 “뭐 어때”라는 기분이었던 터라 나만 좌불안석이었다.
도착한 식당은 상당한 기품과 격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곳에서라면 피자를 “삿된 음식”이라 표현해도 괜찮을 법한 분위기였다. 차분하고 단정한 인테리어를 지나치게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3000~4000k 사이 색온도의 조명이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곳이 아내 친구 부부의 첫 아이 돌잔치를 한 곳이라는 설명에 나는 “허어” 하고, 아내 친구 부부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몇 번이나 감탄을 했다. 두 번째 저녁 식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단정한 한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그 식당의 음식은 상당히 괜찮았다. 아직 피자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입이 반색을 할만큼 깔끔했다. 덕분에 불러오는 배를 모르는 척하고 또 한 번의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아내 친구 남편에게,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잘 먹었다는 인사를 했다. 그 두 번째 식사 동안 아이들은 식당 앞의 너른 마당을 오가며 마음껏 뛰어놀기도 했다. 어른들 역시, 그냥 귀가하기엔 조금 일렀던 시간을 다소 넉넉히 보낼 수 있어 좋았다. 피자만 먹고 돌아갔다면, 그때의 여행은 그다지 기억할 무언가가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누군가를 초대해 여행을 도모할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혼자일 때 혹은 우리 가족끼리일 때의 사적인 선택과 일행이 확장됐을 때의 공리적 선택은 그 궤가 달라야 한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긴 했지만, 여러 일행과 함께 여행을 한 경험이 거의 없던 내게는 그 작은 체험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순간으로 남아 있다. 덕분에, 내 부모님 그리고 형제의 가족들과 여행을 할 때는 무엇을 우선 순위로 둬야 할지 대충 감을 잡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