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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Oct 03. 2023

얼어붙은 추억들은 얼마나 반짝이는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겨울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나만큼 겨울에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사실 겨울에 이루어지는 ‘여행’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겨울 자체를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가 가슴 속 깊이 들어찰 때의 찌릿한 느낌이 좋았다. 입김이 눈에 보이는 게 좋았고,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아갈 수 있는 얼음판 위가 좋았다.     


당연히 추위에 강했다. 단순히 “강했다”라고 표현하면 맨발에 슬리퍼로 눈밭을 뛰어다니던 유치원 시절의 내가 좀 섭섭해하겠지만, 아직 초등학생도 아닌 아이를 너무 비인간적으로 묘사할 것 같으니 더 이상의 회상은 삼가도록 하겠다. 다만 그런 비인간적인 면모는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져, 겨울에도 창문을 열고 자는 내 잠버릇에 신혼 초기의 아내가 기겁을 하기도 했다는 사실만 덧붙이겠다.     


이 정도로 겨울을 좋아하니 겨울에 여행을 가지는 않는 건 나에게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지치질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겨울을 일상만으로 보내는 건, 더 할 수 없는 시간 낭비였다. 그래서, 눈이 많이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얼어붙은 티티제 호수 옆에서부터 시작되는 검은 숲을 헤매고 다니느라 바지 밑단이 철판처럼 얼어붙었음에도 상쾌한 기분이 들었던 것 역시, 겨울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영에서 맞이한 첫 겨울은 너무나 포근해 낯설 수밖에 없었다. 통영에서 가장 추운 날이라 해봤자 영하 3, 4도 정도가 고작. 그나마도 이런 날이 이틀 이상 이어지면 상수도가 얼어붙거나 계량기가 동파되는 곳들이 많아진다. 더 깊게 묻어 동파를 예방해야 할 만큼 추운 날들이 많지 않은 탓이었다.     


눈은 4, 5년에 한 번 정도 내렸다. 그래서 통영에 모처럼 눈발이 날리면 어른 아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누군가에게 전화를 해 신이 난 목소리로 눈 소식을 주고 받는다.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즐거운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그 눈이 쌓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로 할 때뿐이다. 난 아직도 통영에 잠시 눈이 쌓이던 날, 통영 지역 카페에 올라오던 글들을 기억한다.     


통영답지 않게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나와 아내 역시 무척이나 신기했다. 잠시 고향 서울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카페에서도 오랜만에 눈이 와 너무 좋다는 글들이 속속 올라왔다. 그런데, 통영답지 않게 눈이 오래 내린다 싶은 시점이 지나자, 차가 다니지 못 한다는 글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언덕이 많은 통영에 눈이 쌓이면 그 결과야 안 봐도 뻔한 노릇. 문제는, 평소 눈이 오지 않는 곳이기에 제설장비를 구비하기는커녕 제설 방법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 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였다.      


그래서 점심 무렵부터는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 버스들이 운행을 중단했다. 이른바 ‘고바위’들이 많은 통영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버스들이 멈춰버렸다는 의미와 다름없었다. 그때부터 상황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통학과 출퇴근 걱정이 담긴 글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고 버스는 제대로 다니냐는 문의글도 끊이질 않았다. 잠시 동안 통영에 만들어졌던 Winter Wonderland는 금세 사라졌다.      


그 순간이 아쉬웠냐고? 아니. 아무래도 통영은 눈과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눈이 쌓인다 한들, 야자나무와 종려나무들이 하얗게 변하는 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게다가, 앞서 묘사했던 것처럼 일상이 유지되지 않는 이벤트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통영에서 몇 번의 겨울을 보낸 후 나는 내 일상에서의 낭만적인 겨울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통영의 겨울은 기다려졌다.      


겨울이 되면 나는 작은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무엇인가를 굽기 시작한다. 주로 고기지만 가끔은 생선일 때도 있고 굴일 때도 있다. 굽는 게 지루해질 때면 튀김을 한다. 커다란 웍을 버너를 장착한 캠핑용 가스통 위에 얹고 기름을 잔뜩 붓는다. 알맞은 온도가 되면 튀김옷을 입힌 굴부터 아이들이 좋아하는 고구마도 튀긴다.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라고 적혀 있는 새우튀김을 비롯한 각종 냉동 튀김들도 호기롭게 튀긴다. 모두 데크가 깔린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집안 어딘가에 기름이 튀거나 냄새가 밸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좋다.    

  

이렇게 즐거운 일을 왜 겨울에만 하냐고? 따뜻한 통영은 4월부터 11월까지 모기와의 만남을 거부할 수 없다. 게다가 시골에 위치한 우리집은 모기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곳이기에 느긋한 맘으로 조리를 하기 위해서는 추운 날씨가 필수적이다. 물론 볶음 종류의 요리는 평소에도 바깥에서 하곤 하지만, 아이들까지 모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그 자리에 무엇인가를 먹을 수 있는 계절은 겨울이 유일하다.      


하지만, 먹는 것으로 겨울에 대한 아쉬움이 모두 가시지 않는 게 문제. 가끔은, 무심코 들이마신 찬공기가 그야말로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나보다 더 ‘진짜 겨울’을 바라는 건 아이들이었다. 눈이 두텁게 쌓인 벌판 위를 혹은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 위를 신나게 달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다. 겨울을 싫어한다면 모를까, 누구보다 눈과 얼음과 찬바람을 좋아하는 내가 그런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겨울을 온전히 놀이의 계절로 인식할 수 있는 날들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 가족은 그 어느 계절보다 겨울에 많은 여행을 떠났다. 눈을 볼 수 있으면서도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제주도를 가장 많이 다녀왔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겨울다운 곳인 강원도도 일부러 겨울에 맞춰 다녀왔다. 덕분에 통영 아이들치고는 제대로 겨울을 즐긴 경험을 꽤 많이 갖고 있다. 내가 아빠로서 뿌듯해 하는 몇 안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누구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의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의견을 반영한 겨울 여행은 한 번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 겨울엔 아내가 원하는 곳으로 행선지를 정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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