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겨울맞이여행
자신의 첫 여행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세히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지만, “이게 여행이구나”라는 느낌을 받은 게 언제였는지는 아직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1학년, 첫 피서지에서였다.
7월 말 어느 날, 외가 친척들과 승합차를 함께 타고 출발한 우리 가족은 강원도 동해안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사람이 적고 모래가 고운 그곳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고 깨끗했다. 길이 좋지 않아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덕분이었다. 영동고속도로가 지금만큼 곧게 뻗어 있던 때도 아니고, 서울양양고속도로는 계획조차 잡히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과열된 브레이크의 탄내를 맡으며 한계령을 넘어 동해에 도착한 많은 사람들 중 많은 수는 한숨을 쉬며 속초에서 휴가를 즐기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진취적이었던 외삼촌들은 북쪽으로 1시간 30분 이상 더 차를 달렸다.
그렇게 외진 곳에서 3박 4일을 보내는 동안,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찬란한 은하수를 만났다. 생애 첫 은하수였다. 이후 몇 번 다시 은하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만큼 웅장하지도, 밝지도 않았다. 그래서, 7월말 어느 밤 작은 시골집 평상에 앉아 병에 든 사이다를 탈탈 털어 마시기 위해 고개를 뒤로 젖히던 순간 내 눈에 쏟아지던 그 빛나던 별의 강은, 지금까지도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검고 빛나는 하늘을 보며, 여행은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때가, 다른 무엇보다 여행을 좋아하게 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 강렬한 기억이 만들어진 곳은 당시 강원도 최북단 해수욕장인 화진포였다.
화진포는 그 이후로도 여러 번 다녀왔다. 수능 이후, 세상의 종말을 목격하려는 사람의 표정으로 2박 3일 동안 혼자 어슬렁거리기도 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또다시 혼자 혹은 친구들과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하루종일 술만 마시다 오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하던 때도 그 귀한 하루짜리 월차를 화진포 당일 여행을 위해 기꺼이 사용했다. 아직 운전면허도 없던 시절, 고속버스와 속초 시내버스를 번갈아 타며 네 시간 가까이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그곳이 내 여행의 시작점이었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떠나고 싶은 어딘가”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통영으로 이사를 오고 나니, 화진포에 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물론 엄두조차 못 내는 일은 아니었다. 필요가 생기면 강원도까지도 언제든 다녀왔다. 한 번은 급히 촬영해야 하는 일 때문에 통영-영월-강릉-통영 코스를 하루 만에 달린 적이 있다. 주행거리 약 1,000km에 주행시간 약 12시간.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그러니, 강원도에서의 일정이 잡혀도 하루 정도의 여유가 있어야 화진포를 머릿속에 떠올릴 여력이 생겼다. 그렇다고 해서 가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2018년 설 연휴는 2월 15일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설날을 서울에서 보낸 후 화진포에 가기로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눈구경이었다. 지난 당진 여행 당시, 눈에 갈급하던 큰 녀석에게 눈구경을 실컷 시켜주고 싶었다. 2월 9일 개막한 평창동계올림픽 덕분에 강원도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벤트로 축제 분위기일 테니 남해안 끝자락에 살고 아이들에게 “국제적 감각”을 익히게 하는 데에도 좋은 기회일 게 분명했다. 오랜만의 화진포 방문 또한, 내게는 중요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계획대로 설 다음 날 강원도로 출발했다. 오랜만에 춘천에 들러 하루를 보내고, 속초에서 이틀을 지내는 동안 화진포에 다녀온 뒤, 내려올 때는 울진을 들렀다 경주에서 하룻밤 자기로 계획을 세웠다. 아이들과는 처음 떠나는 일주여행인데다, 오랜만에 강원도로 향한다는 생각에 나는 모처럼 진짜 여행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당시 여행에서 특기할 부분 중 하나는, 춘천과 속초에서의 숙박을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데에 있었다. 잠이 들면 종횡무진 매트리스를 누비는 아이들 때문에 숙소를 잡을 때는 항상 온돌방을 선택해야 했는데, 많은 호텔의 온돌방들은 시설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겨울에는 온돌에 지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워낙 늘어나다 보니 예약도 쉽지 않다.
그래서 춘천은 침대와 요와 이불 세트가 함께 제공되는 오피스텔을, 속초에서는 침대방과 온돌방이 모두 구비된 아파트를 빌렸다. 모두 만족할 만한 곳들이었는데, 특히 속초의 아파트는 세탁기와 건조기를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었던 덕분에 상당히 편리했다. 잠버릇이 험한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경우라면, 에어비앤비가 꽤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춘천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우리가 향했던 곳은 KT&G에서 운영하고 있는 춘천상상마당. 의암호를 조망할 수 있는 그곳은, 원래 춘천 어린이회관으로 사용되던 공간이었다.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봄과 가을이면 춘천이 호반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를 너무나 선명하게 제시한다. 물론 겨울이라 해서 풍경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개인적으론 아직 호수 위에 맴돌고 있는 물안개를 만날 수 있는 겨울 춘천을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풍경이란 무슨 소용이겠는가. 엄마와 함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녀석들은, 당시 또래 사이에서 유행하던 카드 조합형 변신 로봇을 갖고 놀던 또래의 동네 아이들과 조우했고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발걸음이 움직이질 않았다. 바다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큰 물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아이들은 노란 잔디에 옹기종기 쪼그려 앉아 어떤 로봇과 어떤 로봇을 조합하는 게 더 강한지, 그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진지하게 토론을 이어갔다. 여행 기간 동안 아이들이 꼽은 두 번째로 재미있는 순간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예상보다 여유롭게 카페에서 카페인을 보충할 수 있었던 우리 부부가 속초로 향하는 길에 들른 곳은, 원주의 뮤지엄 산이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로도 유명한 이 공간은, 일본의 대표적인 예술 섬이라 불리는 나오시마(中島) 여행 이후 “당분간 안도 다다오 건물은 안 보고 싶다”는 내 의지가 무력화된 곳이기도 했다. 아내가 호기심을 보였을뿐더러 아이들을 위한 프린팅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었고, 무엇보다 나오시마에 다녀온 지 10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미니멀리즘에 대한 지루함이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수 많은 노출콘크리트 건물들에 대한 건조한 기억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 정확히 말하자면 큰 녀석은 사정이 달랐다. 아이들 역시 단순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의 실내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그곳에서 진행하는 실크 스크린 카드 제작 체험에는 진심이었다. 다만 그 진심이 외부로 표출되는 양상은 달랐다. 아직 채 다섯 살이 되지 않은 작은 녀석은 이곳저곳에서 이것저것에 관심을 보이느라 바빴던 반면, 큰 녀석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실크 스크린에 물감을 묻히고 쓸어내리는 작업을 진지하게 반복했다. 그렇게 완성된 작은 그림 위 그림 하나가, 녀석에게는 꽤 즐겁고 소중한 선물이 됐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작은 녀석은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느라 쉴 틈이 없었다. 양손을 수갑으로 채울 수는 없으니, 아이의 앞을 막아서거나 손을 잡아당기며 무엇인가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시각을 통한 관찰이 우선인 큰 녀석과 정반대로, 이 녀석에게 중요한 것은 촉각이었다. 그래서 항상 감시의 눈길이 함께해야 했다. 그러니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고, 나 혹은 내 주위의 누군가로 인해 질서가 흐트러지는 걸 상당히 싫어하는 내 입장에서는, 작은 녀석의 그런 기질이 세상 무엇보다 피곤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천상 모범생 타입인 큰 녀석은 무슨 말을 하면 ‘듣는 시늉’이라도 하는 반면, 흔히 “부산스럽다”고 묘사되는 아이들은 많이들 그렇듯, 작은 녀석은 나 혹은 아내의 주의가 경고에 대해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결국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곤 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성격 급한 내게는 그런 모습이 교정해야 할 나쁜 행동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말 안 듣는 어린 시절은 존재하기 마련이겠지만, 불행하게도 유치원 시절 내 별명은 ‘영국 신사’였다.
어렸을 때의 나는, 선생님의 말을 안 듣는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더 오래 놀 수 있거나 더 빨리 집에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모이랄 때 모이지 않고 앉으랄 때 앉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선생님들 못지않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내가 얌전했던 것은 타의 모범이 되는 천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셈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전혀 다른 사고방식으로 인해 또래의 감정도 이해하지 못 하던 나였으니 지켜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에 대한 공감 정도는 현격히 낮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내도 작은 녀석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저렇게 태어난 걸 어쩌겠어”라는 입장이었던 반면, 나는 어떻게든 고쳐보겠노라 덤벼들기 일쑤였다. 그래서 화도 내고 소리도 질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하지 말았어야 할 행동이었지만, 그때의 난 아이를 바꿀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사이가 아주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 작은 녀석이 원하는 만큼 격렬하게 놀아줄 수 있는 건 아빠가 유일했으니까. 속초에 도착한 후 에너지가 방전된 큰 녀석은 쉬게 하고 작은 녀석하고만 사우나에 갔던 것도, 뮤지엄 산에서 덜 놀아준 미안함을 달래주기 위함이었지만, 이 역시 계획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미리 봐두었던 사우나는, 우리 동네에서 보던 것보다 크고 웅장했으며, 어두웠다. 그야말로 성인취향이었던 곳. 그러니 발가벗고 낯선 곳에 들어선 아이는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작은 녀석은 들어서자마자 되돌아가자고 징얼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탕에는 몸도 제대로 담그지 못하고 샤워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니,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건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머리를 감기고 비누칠을 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울고 있었다. 물론 나는 점점 더 화가 났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몇 년 후, 한 심리학 교수의 강연을 듣고 나서야 내가 왜 그때 화를 냈는지 깨닫게 됐다. 남자들은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을 경우 상당한 좌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다. 목표지향적인 동물적 본능에 기인한 현상이 아닐까, 라는 분석이 이어졌다. 나는 깊이 공감했다. 그런 좌절감은 분노로 전환되고 분노는 좌절의 원인으로 향하기 마련. 어렸을 때의 내가 아버지와 그랬던 것처럼, 아빠가 된 나는 작은 녀석과도 목욕탕에서의 따뜻한 기억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무산되자 화가 났던 거였다. 당시만 해도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가 없던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속초에서의 첫날을 보내야 했다.
작은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거둘 수 없기에 여전히 개운치 못한 기분이었던 둘째 날, 그렇게 가고 싶었던 화진포로 길을 잡았다. 아이들에게는 “파도 치는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말로 목적지를 설명했다. 집에서도 어린이집 등하원길에서도 마트에 갈 때도 항상 보는 게 바다지만, 통영 바다에는 파도가 없다. 워낙 섬이 많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호수라 생각할 정도로 바다가 잔잔하다. 그래서 남해안 사람들은 동해가 시끄럽고 밋밋하다고 툴툴거리는 경우도 있을 정도. 그래서 나는 폭발하듯 밀려오는 그 하얀 파도가 그리웠다.
숙소에서 1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화진포 바다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초등학생 때의 내가, 수능을 끝냈을 때의 내가, 회사생활에 찌들어 있던 내가 뛰어다니거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괜히 서성거리는 모습을 꽤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모습이 되어 이곳을 다시 찾을 거라는 상상을 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20대까지의 나는 한 번도 아빠가 될 거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한참 감상에 빠져 있는 사이,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모래밭에 이런저런 그림을 그리거나 한글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통영 바다에는 백사장도 없지. 한창 모래놀이를 즐길 나이의 아이들이지만 겨울이라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그런 아이들을 부르며 손짓을 했다. 와서 파도를 좀 보라고. 아이들은 내 곁으로 다가와 예상보다 오랫동안 하얗게 부서지기를 반복하는 바다를 바라봤다. 아마 그 반복적이면서도 매번 새로운 파도의 흔적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뒀다. 패딩을 입고 털모자를 쓴 짤뚱한 뒷모습의 아이들이 겨울치고는 따뜻한 햇살 아래 파도를 향해 서 있던 그 풍경은, 지금의 내가 화진포에 대해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다.
한 시간 남짓 동안 아빠의 여행을 즐겼으니, 이번엔 아이들을 위한 여행으로 돌아갈 시간. 우리는 대관령 어느 마을로 향했다. 주민들이 눈썰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을 지형을 이용해 굴곡진 눈썰매 코스를 만들어놓은 게 재미있어 보였다. 덕분에 아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튜브 위에서 눈밭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사람도 그리 많질 않았던 덕분에 줄을 설 필요도 없었고 매점에서 판매하는 따뜻한 음식들도 납득 가능한 가격표를 달고 있었기에 뭔가를 구입할 때 내적 갈등을 겪지 않아도 괜찮았다. 서울에 살았다면 매년 겨울마다 찾았겠다 싶은 곳이었다.
대관령에서 다시 강릉으로 넘어온 우리는,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전이었던 한 맥줏집으로 향했다. 운전을 해야 했던 나는 한 스푼 혀를 적신 게 전부였지만, 아내는 오랜만에 맛있는 맥주를 마실 수 있어 기분이 좋아졌다. 안주 겸 간식으로 주문한 피자도 꽤 훌륭해서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계올림픽 관람을 위해 모여든 외국인 관광객들이 연출해준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맥줏집의 인테리어도 그랬거니와, 각국의 국기가 새겨진 응원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저마다의 언어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간에 머물다 보니, 스물아홉에 경험했던 겨울 뮌헨에서의 작은 펍이 떠올랐다. 전날 사우나에서부터 이어졌던 좋지 않았던 기분들도 모두 사라졌다. 모처럼 낯선 곳에서의 즐거운 한때였다.
아침 식사 직후 속초에서 출발한 우리 중간에 울진에서 점심도 먹고 작은 아쿠아리움도 관람했다. 그렇게 경주 숙소에 도착하자 이제 막 체크인이 가능한 시각이었던 덕분에 바로 짐을 풀고 워터파크로 향했다. 엊그제만 해도 눈밭에서 뒹굴던 아이들은 신이 나 물 속에서 나올 줄을 몰랐고, 덕분에 그날 밤은 모두 쉽게 잠이 들었다. 다른 때보다 많이 돌아다니고 많은 걸 경험했던 여행이었다. 아울러, 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한 며칠이기도 했다.
그다지 간절히 바라지 않았던 모습이지만, 어쨌든 두 아들의 아빠라는 내 현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된 여행이었다. 아이들의 성격과 행동특성이 다르고 그에 맞는 양육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 역시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하게 된 여행이었으며, 이해되지 않는 아이들의 행동에 화를 내는 버릇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된 여행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생각들이 모두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아니었다. 그때보다 횟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모든 게 다 귀찮아질 때가 있는 아빠이며 큰 녀석이건 작은 녀석이건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할 때면 “왜 쟤만 저래”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가끔 아이들에게 큰소리를 내는 일 역시, 아예 없어졌다고는 하지 못 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언젠가 다시 화진포에 가게 된다면, 화를 낸 다음 날 혼자 바다를 바라보며 후회하던 내 뒷모습을 보고 “그래도 그때 이후 많아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 조금씩이나마 노력을 하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