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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Oct 01. 2023

어떻든, 가족

가족여행이라는 단어와 함께하는 이미지들은, 보통 부모와 자녀들 그리고 요즘엔 반려동물들까지, 모두 함께 같은 목적지를 향해 즐겁게 이동하는 모습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이다. 누구하나 빠진 사람 없는 ‘일반 가정’의 구성원 모두가 즐거운 얼굴로 참여하는 이상적인 여행. 하지만 실제 그런 여행은 흔치 않다. 취향으로 인한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니까.      


우리 가족도 아이들이 성장함에 따라 각자의 개성이 점점 뚜렷하게 발현되기 시작했고, 그에 따른 호불호 역시 선명해졌다. 목적지를 정하고 그곳에서의 활동을 선택하고 메뉴를 고르는 일에도 아이들의 의견을 일정 수준 이상 반영해야 했다. 반가운 성장이면서 성가신 참견이었다. 그래서, 온 가족이 함께하기보다는 원하는 사람만 참가하는 여행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이런 계획을 세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을 때 보여줬던 호두의 적극적인 반응 때문이었다.     


경복궁 안에 아직 ‘중앙청’이라 부르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있던 시절,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그곳을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니곤 했다. 살고 있던 돈암동에서는 약 30분 거리였던 데다, 걸어서 교보문고까지 갈 수 있었던 덕분에 심심한 주말을 보내기엔 더 없이 좋은 코스였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통영에서는 그런 대규모 문화시설을 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가까운 국립박물관은 진주성 안에 위치한 진주국립박물관인데, 그 규모는 그 시절 국립중앙박물관과 비교하는 게 민망한 수준.      


그래서 호두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다. 예약자에 한해 입장이 가능한 어린이박물관도 어렵게 예약에 성공했다. 나와 아내 역시 용산으로 이전한 국립중앙박물관은 처음이었기에 적잖은 기대를 하고 있던 터였다. 나열식 전시가 아니라 특정 유물을 집중 조명하는 형태의 전시로 큐레이션이 전환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리고 관람객들의 후기를 통해 그러한 전시가 상당히 좋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부터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왔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는 어느 여름 아침, 개장 시간에 맞춰 박물관에 도착한 우리는 가장 먼저 어린이박물관부터 찾아갔다. 시설도 깨끗하게 관리돼 있었고 체험할 수 있는 요소들도 적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우리집 어린이들은 너무 커버린 상태였다. 미취학인 상태에서 왔다면 좀 더 재미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뒤로 하고 시작된 본격적인 박물관 관람은, 예상보다 좋았다. 반가사유상 두 개를 오랫동안 마주할 수 있는 <사유의 방>은 명성만큼이나 훌륭했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이 된 알밤이는 유물들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이것저것 질문도 많이 하고 안내문도 꼼꼼하게 읽어갔다. 하지만 호두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금방이라도 바닥에 누울 것 같은 자세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고, 큰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로 “나가고 싶어”를 끝없이 반복했다. 아내가 몇 번 달래고 호기심을 끌어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도 해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계획보다 이른 철수를 선택해야 했다.      


당연히 알밤이는 아쉬워했지만, 그렇다 해서 호두를 억지로 끌고 다닐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알밤이는 앞으로도 박물관과 과학관 같은 곳을 더 많이 가길 원하게 됐지만, 호두는 박물관은 절대 가지 않겠다 공언했다. 사실 취향이 갈리는 지점이 비단 박물관 관람에 국한되는 건 아니었다. 식성 또한 전혀 달랐기에 절충지를 찾으려면 중국집이나 쌀국수집 정도가 최선인 경우가 많았다. 
 

양쪽 모두를 존중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였다. 원하는 사람만 원하는 곳에 가기로 했다. 모두가 동시에 만족할 필요는 없는 법이니까. 이번엔 알밤이가 떠났다면 다음번엔 호두를 위해 길을 나서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여럿이 있어야 즐거움이 커지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나의 기호가 온전히 존중받는 것도 아이에게는 좋은 경험이 될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 편이 나나 아내에게 편한 방법이었다. 우리 가족의 따로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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