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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Nov 22. 2017

겨울,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한다는 것_(1)

스톡홀름

한 겨울, 가장 겨울다운 곳은 어딜까.

남극이나 북극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곳을 제외하고

알래스카처럼 너무 황량한 곳을 제외한다면

남는 곳은 러시아 혹은 스칸디나비아 정도.

하지만 러시아는 소련의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

게다가 어렸을 때 읽었던 '바보 이반' 덕분에

그 얼어붙은 땅 속 어딘가에는 악마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이다.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아에로플롯(러시아 국영 항공사)의 이런저런 에피소드와

내가 헬싱키 중앙역에서 직접 보았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해 있던, 퀭한 눈을 한 러시아 승객들의 표정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정차한 열차 옆에 로봇처럼 서 있던 무표정한 승무원들 역시.


나는 진짜 겨울을 보고 싶었다.

철원만 가도 러시아 부럽지 않은 추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친구의 조언도 있었다.

온도계가 얼어 터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고 여러 차례 강조를 했던 녀석의 조언이었던 터라 믿음직했다.

서울도 눈이 많이 쌓이면 이런 풍경이 되긴 한다.


하지만 거기엔 내가 오랫동안 상상했던 겨울이 거기엔 없었을 게 분명했다.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 속에 나오던 겨울들 말이다.

주인공을 힘들게 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아갔던 그 겨울들.

하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누군가에게는 더 없이 아름답고 따뜻했던 겨울들.


그런 겨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건

20대의 첫 여름,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하면서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첫 여행 이후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를 네 번 여행하면서

나는 반드시 스칸디나비아의 겨울을 직접 경험하겠다 다짐을 했고

지키지 않아도 됐을 스스로와의 약속을 20대의 마지막 겨울이 되었을 때 실행에 옮기게 됐다.


목적지는 스톡홀름이었다.

타이항공을 탔는데, 비수기라 자리에 여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비행기 안은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내려는 사람들 때문인지

온통 금발의 백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느 때처럼 비행기 안에서는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내가 기억하는 스톡홀름은 유쾌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무엇을 물어봐도 웃으며 답해주는 사람들과

오래된 벽돌로 높지 않게 쌓아올린 아름다운 건물들.

여러 섬을 잇는 다리들과 그 다리를 따라 오가던 분방한 여행자들.

스톡홀름의 여름 풍경이었다.

그리고 12월 21일 아침 8시 무렵 도착한 스톡홀름은,

차갑고 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전 8시지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도시.


여름이면 햇볕을 받으러 나온 사람들이 누워 뒹굴거리던 시청 앞 잔디밭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고

하늘은 꾸물꾸물 어두운 구름들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바람은 차가웠고 공기는 날카로웠다.


날은 추웠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했다.

문제는 짐이었다.

60리터짜리 배낭과 카메라 가방을 계속 갖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역의 코인락커에 넣어두는 게 최선이긴 했지만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짐을 앞에 두고 잠시 한숨을 쉬고 있는데, 동양인 커플이 말을 걸어왔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이었다.

내게 카메라를 건네주고 포즈를 잡기 위해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중국어였기에

"이 얼 싼"이라 말하고 셔터를 누르리라 맘을 먹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 입에서는 "이찌 니 싼"이 나왔다.


중국인 커플은 내게 "아리가또"라고 인사를 했고 나는

"아 미안, 나 원래 한국인."이라고 사과를 했다.

그들은 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뜻의 미소를 지으며 멀어져갔다.


머릿속의 외국어 전환시스템이 아직 부팅을 하기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친숙하지만 낯설고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소통은 되는 어정쩡한 상태로

나는 겨울 스톡홀름의 아침 속에 다시 혼자 서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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