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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Nov 24. 2017

겨울,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한다는 것_(2)

스톡홀름

해는 뜨지 않았지만 날은 조금씩 밝아졌다.

역에 가서 코인락커에 배낭을 구겨넣었다.

아직 스톡홀름의 이런저런 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한 번은 길을 잃은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도 했다.

아주 예전에 갔던 숙소를 다시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이상하게 같은 자리를 뱅뱅 돌기만 했다.

그 숙소의 주소를 손에 쥐고 한숨을 쉬고 있는데 앞에 경찰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 오고 있었다.

난 손을 들어 경찰차를 멈추게 했고 경찰들에게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길을 알려 달라 했다.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찰은 내게 대뜸 차에 타라 했다.


얼씨구나 좋구나 하며 경찰차에 올랐다.

일방통행로가 많은 스톡홀름 시내를 경찰차는 이리저리 달렸다.

경찰들은 유명한 건물 혹은 장소를 지날 때마다 내게 그곳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빽차 투어'였던 셈이었다.

대략 20분 정도를 달려 경찰차는 내가 원하던 장소에 도착했고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경찰차 뒷문의 구조 때문에

나는 경찰이 문을 열어주자 그제야 느릿느릿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내게 즐거운 여행을 하라며 웃으며 인사를 해줬고

나는 덕분에 정말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해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그때까지 역에 앉아 있었다.

밤새 잠을 못 잔 상태로 새벽에 도착을 했던 데다

벌써부터 몇 시간 동안이나 찬바람을 맞고 있었던 터라

무언가를 한다거나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스톡홀름에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기도 했다.

하룻밤 잔 후, 큰 배를 타고 핀란드로 건너가는 게 내 계획이었다.

아무 생각 없는 이방인에게 역(驛)은 참 아늑한 공간이다.


아마 정오 무렵에나 밖으로 나섰던 모양이다.

그제야 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더 많은 곳을 향해 걸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던, 조금은 잊기도 했던 스톡홀름의 거리들이

다시 내 눈앞에 펼쳐졌다.









국내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스타일의 크리스마스 용품들을 보니

그제야 내가 스톡홀름에, 스칸디나비아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확 좋아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더 좋았다.

난 여전히 피곤했고 그래서 눈이 뻑뻑했으며 입이 썼다.

처음 이곳을 돌아다녔을 때만큼 들뜨지도 않았고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좀 더 천천히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릴 수 있었다.


그렇게 느려진 내 자신에 대해 화가 나거나 조급해지지 않는 게 좋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것들 앞에 서 있는 게 좋았다.

무엇보다, 다시 그곳에 돌아왔다는 게 좋았다.


그런 기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20대 초반이었다면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헌책방들에 들어갔던 것은.






이제 와 생각하면, 아니 당시에도 그랬지만, 그런 곳에 헌책방이 있다는 게 참 놀라운 일이다.

한국으로 치환하자면 명동 한복판에 헌책방 여러 개가 있는 셈인데,

그 물가 비싼 스톡홀름에서 저런 가게가 운영된다는 게 참 신기하기 그지없다.

덕분에 나는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고

점차 노곤해졌다.


낡은 책냄새가 가득했던 공간을 나서니

거리의 풍경은, 낮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좋았다.

스톡홀름에서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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