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헬싱키에 도착한 건 오전 8시쯤이었다.
전날,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긴 했지만 워낙 컸던 터라 불편함은 없었다.
한눈에 봐도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바깥을 보니
외려 배에서 내리는 게 싫어졌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바로 옆나라지만 기차로는 오갈 수가 없다.
철로의 폭, 즉 궤간(軌間)이 다르기 때문이다.
핀란드의 철로는 러시아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그래서 핀란드에서 러시아는 기차가 오가지만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는 배나 버스 혹은 비행기를 이용해야 한다.
발트해를 가로 지르는 실자 라인이나 바이킹 라인은
그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운송수단이 되었다.
헬싱키는 추웠다.
스톡홀름보다 더 추웠다.
두 겹의 자켓을 입고 등에는 배낭을 메고 앞으로는 카메라 가방을 둘렀건만
헬싱키는 추웠다.
진심으로 다시 배에 타고 싶을 정도로 추웠다.
유치원 때부터, 눈밭을 맨발에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내가
그렇게 춥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춥다고 서 있다가는 그대로 얼어붙을 것 같아서
삐걱거리는 로봇처럼 시내를 향해 걸었다.
전차를 기다려도 됐지만, 전술한 것처럼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점점 가까워지는 그곳의 풍경은 더더욱 살풍경했다.
부두가, 정확히 말하면 바다가 얼어붙어 있었다.
저 앞에 희게 반짝이는 헬싱키 대성당이 얼음결정처럼 보였다.
내가 뭐하러 비싼 돈 들여 여기까지 왔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두어 달 후, 드라큘라의 성으로 알려진 루마니아의 브란 성에 가려고 하자
당시 여행 중이던 헝가리의 여러 사람들이 "너 지금 거기 가면 얼어죽어!"라며 말리던 순간에도
나는 "얼어붙은 바다도 봤는데 뭘."이라며 이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헝가리 사람들이 "드라큘라도 사실은 겨울에 얼어죽은 거라니까!"라며
날 극구 말리는 바람에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부두 왼쪽으로 보이는 옛 시장으로 얼른 들어갔다.
다른 건 생각할 틈도 없는 급박한 순간이기도 했다.
시장은 따뜻했다.
96년 여름, 처음 이 시장을 방문했을 때는 왜 이런 실내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걸까 의문이었는데
겨울이 되니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배가 고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시장에는 먹을 게 많았다.
저 훈제 생선 위에 버터와 소스를 발라서 숯불 위에 다시 구워 먹으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다. 연기가 워낙 심해 야외 노점에서만 팔았던 터라 겨울에는 기대할 수 없는 호사였다.
앞뒤로 무거운 짐을 들었건만, 시장에서는 몸이 가뿐하게 움직여졌다.
새우와 이런저런 채소들이 많이 들어간 샌드위치에 커피까지 한 잔 해서 그랬는지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다시 용기를 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지만,
몸이 움츠려드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