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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정 Nov 30. 2017

겨울, 스칸디나비아를 여행한다는 것_(4)

헬싱키

刻印, 인상찍히기, Imprinting


"오스트리아의 과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발견한 현상. 후 수시간 내에 걸을 수 있는 조성성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현상. 양, 염소, 모르모트에 나타나며 조류에서도 많이 연구되고 있다. 닭이나 집오리는 부화 후 바로 어미 새의 뒤를 쫓는 행동을 한다. 이것은 어미새가 아니더라도 움직이는 물체가 계속해서 보이면 그것을 쫓는다. 각인이 일어나는 시기는 부화 후 24시간 이내라고 하며, 뇌의 발육 초기에 감각자극에 의해 뇌에 각인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각인 [imprinting, 刻印] (생명과학대사전, 초판 2008., 개정판 2014., 도서출판 여초)


헬싱키는, 그리고 핀란드는 내게 북유럽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도시였다.

나중에야 헬싱키가 그리고 핀란드가 스칸디나비아 반도 안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핀란드 자체가 인종과 언어 모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와 다르다)

어쨌든 한동안 내 기억 속의 북유럽은, 호수의 나라에서 보았던 것들과 경험했던 일들의 몽타주와 다를 게 없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96년 여름, 핀란드에서 머문 날들은 고작 일주일 남짓이었다.

그동안 내가 갔던 곳들은 수도인 헬싱키와 코우볼라(Kouvola), 라티(lahti), 산타가 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로바니에미(Rovaniemi) 정도가 전부였다. 모두 작거나, 상당히 조용하거나, 아주 멀리 있는 곳들이었다.

그런데 그 도시들에서 난 꽤 재미있는 경험들을 했다.

코우볼라에서는 "난 한국이라면 전쟁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나라에서 여기까지 여행을 오다니, 이제 좀 살만해진 모양이지?"라며 호기심을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한테 술을 얻어 마시며 전쟁 이후 한국에 대해 설명해줘야 했고

라티에서는 역에서 함께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내게 사탕과 음료수를 나눠주며 이것저것 한참 묻다가, 기차 시간이 다 되었다는 인사와 함께 "지금까지 살면서 동양인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어. 고마워."라고 악수를 청하던 아가씨를 만나기도 했다.

로바니에미에서는 호수 위에 떠 있는 배에서 들려오는, 한국의 "뽕짝"과 비슷한 노래에 춤을 추는 그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지금 충주호에 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신기하고, 그래서 낯설지만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모습의 사람들. 그리고 풍경들.

그 모든 경험의 시작이 바로 이 헬싱키에서부터였다.


헬싱키를 대표하는 동상인 세 명의 대장장이. 핀란드 사람들의 협동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물론 그때는,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녹색 공원에서 한가롭게 누워 있었고 눈길이 닿는 어디에든 아이스크림 가판대가 보였다.

찬란하고 신선한 햇살은 밤 9시 무렵에나 사라질랑 말랑 애를 태웠고

바람은, 여름의 그것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선선했다.

아름다운 풍경이었고 즐거웠던 기억이었지만, 겨울에는 이곳 역시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해서, 진한 아이스크림을 한 손에 들고 어슬렁거리거나

시장을 기웃거리며 산딸기나 껍질콩 같은 신선한 주전부리를 우물거리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아까 얼음의 결정처럼 보였던 헬싱키 대성당이었다.


'성당'이라 부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신교 종파인 루터 교회의 예배당이다.


핀란드는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에서 분파된 루터파 개신교가 가장 많은 신도를 갖고 있다. 전체 인구의 70% 정도.

러시아의 침공과 함께 전래된 러시아 정교회도 있었는데, 핀란드의 독립과 함께 '핀란드 정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가톨릭 인구는 전체 인구의 0.2% 정도인 12,000명밖에 되지 않는데, 아마 전 유럽에서 가장 적은 가톨릭 신자를 가진 나라이지 않을까 싶다.


이상은 내가 핀란드를 여행할 때마다 읽었던 여행 안내서의 '종교' 카테고리에 있던 내용들을 축약해놓은 것들이었는데,

이상하게도 핀란드와 관련된 내용들은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지금까지도 잘 자리를 잡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여행 프로그램에서 핀란드가 소개되면, 내가 경험했던 다른 어느 나라의 이야기를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집중해서 시청하게 된다.

내 스스로도 궁금했던 그 이유에 대해 나는 '각인 때문'이라 결론을 내렸다.


헬싱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봤던 이 성당의 모습 역시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친절하고 순박한 사람들

맑고 선선한 여름 바람

어두워지지 않는 하늘

맑은 호수와

그 위에 하얗게 빛나던 자작나무들


그때만 해도 카메라를 갖고 다니지 않던 때라 오직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풍경이지만

그래서 더 생생하고 그리운 20년 전의 첫 인상.


아담한 외관의 헬싱키 중앙역


그때의 기억들은, 거리를 걷고 잠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 반복되는 반추의 과정 속에 이른 밤이 찾아왔다.


헬싱키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내일은, 드디어 산타마을로 출발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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