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_4
대학에서 맞이하는 첫 여름방학 무렵이었던가.
한비에게서 갑자기 혈뇨 증상이 나타났다.
깜짝 놀란 아버지께서 한비를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셨다.
진단명은 방광 결석이었다.
소변을 자주 참다 보니 방광에 결석이 생겼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진돗개는 집안에서 대소변을 보지 않는 개다.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좁은 마당 구석에서 변을 보던 한비를 종종 목격했던 탓에
환경에 적응을 한 거라 생각하고 넘긴 게 큰 잘못이었다.
한비는 개복수술을 받아야 했다.
적잖은 수술비가 소요됐지만, 우리집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그 돈이면 개 몇 마리는 더 사겠다"는 이야기들을 했다.
아직 개, 아니 반려동물 전반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은 시기였던 터라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족들은 수술을 받고 돌아온 한비를 극진히 보살폈다.
"실밥을 뽑을 때까지 절대 짖게 하면 안 된다"는 말에 따라
한비는 마당에서 집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직 회복기간이었던 어느 날 이른 새벽
한비를 옆에 끼고 주무시던 아버지의 부름에 번쩍 눈을 떴다.
잠자고 있던 나를 급하게 흔드시던 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야, 한비가 숨을 안 쉬는 거 같다."며 불안한 표정이었다.
벌떡 일어난 나는 조심스럽게 한비 쪽으로 다가갔다.
옆으로 누워 있는 한비는 사람의 기척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침을 묻힌 손가락을 한비의 코 가까이로 대보았다.
찬바람이 오락가락 느껴졌다.
그제야 한비의 가슴을 보니 곱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멀쩡하게 숨 쉬고 있는데 왜..."
긴장이 풀린 내가 한숨을 쉬며 아버지를 돌아보자
아버지 역시 그제야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아까 봤을 때는 숨을 안 쉬는 거 같았거든. 아무튼 수고했다. 아이고."
다시 한비 옆에 누운 아버지는 한비를 가볍게 안아주고 다시 잠에 드셨다.
하지만, 이런 보살핌 속에서도 한비가 짖는 걸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대문 밖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꼬마들 소리에
가족들의 경계를 뚫고 마당으로 뛰어나간 한비는
"멍멍멍!" 하고 짖다가 "깽깽!" 하고 비명을 질렀다.
한비는 곧바로 동물 병원으로 실려가 재봉합을 해야 했다.
아직 한비가 실밥을 뽑기 전, 나는 첫 배낭여행을 위해 핀란드로 떠나야 했다.
헬싱키까지 직항이 없었던 터라 나리타에서 1박 후
스톡홀름-헬싱키로 이어지는 복잡한 스케쥴에 따라야 했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고 난생 처음 해외로 향하는 초보 여행자에게는 그리 만만한 코스가 아니었다.
집을 떠난 지 대략 24시간이 됐을 무렵에야 도착한 스톡홀름 공항 대합실에서
나는 집에 안부를 전하기 위해 공중전화를 찾아 그 비싼 국제전화를 걸었다.
국제전화 거는 법을 헷갈려 지나가던 사람의 도움까지 받아 겨우 집전화에 신호를 보냈다.
몇 번의 뚜루루 소리 끝에 들여온 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야, 한비 입에서 피가 철철 나. 이거 어떡하냐."
아버지는,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도착하는 곳에 혼자 떨어져 있는 아들에 대한 걱정보다
쥐를 쫓다 철사에 혀를 찔려 피가 난 한비를 더 깊이 걱정하셨다.
그래서 그 짧은 통화 동안 내가 한 말은 "예, 핀란드 가서 다시 전화드릴게요." 정도가 전부였다.
대략 20일 정도의 북유럽 배낭여행을 마치고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한비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웃으며 꼬리를 흔들며 마당을 가로질러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실밥을 뽑은 후에도 계속 집안에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게 어머니의 설명이었다.
"저놈의 털을 다 어쩔 거야"라는 한숨이 뒤를 따랐지만
나와 동생 모두가 내심 간절히 바라던 바였던 터라
어머니를 제외하면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내 배낭에는 노르웨이의 어느 반려동물 전문점에서 구입한 개 샴푸도 들어있었다.
진돗개를 모르는 사장님에게 "아키다를 닮은 한국 전통 견종"이라는 설명 끝에 추천 받은
무척이나 귀한 샴푸였다.
내가 우리 가족들을 위한 선물들 중 가장 먼저 구입한 것이기도 했다.